교양 이야기/전쟁 이야기

역사: 포클랜드 전쟁(1982.4.2)

영일만2 2014. 9. 8. 07:49


英-아르헨티나 영유권 다툼

1982년 4월 2일 금요일 아침 아르헨티나 해병 700명이 항공모함 1척과 함정 5척의 지원을 받으며 영국의 지배하에 있는 동포클랜드 포트 스탠리를 기습 침공함으로써 포클랜드 전쟁의 불을 지폈다.

포클랜드는 남아메리카 남단에 위치한 군도로 전쟁 당사국인 아르헨티나로부터 480㎞, 영국으로부터는 무려 1만3000㎞나 떨어져 있으며 주 섬인 동·서 포클랜드와 그 주변의 샌드위치 섬을 비롯한 220여 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돼 있다.

이 섬의 총 면적은 1만1718㎢로 우리나라의 전라남도 면적과 비슷하며 전쟁 당시 인구는 약 1800명으로 대부분 영국계였다. 이 섬은 남극 개발의 전진 기지로 중요하며 일대의 대륙붕에 약 2000억 배럴의 석유·천연가스가 매장돼 있어 경제적 가치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18세기 중엽, 남미 전역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초강대국 스페인은 이미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영국인들을 추방하고 50여 년간 이곳을 식민지로 지배해 왔다.1808년 스페인이 나폴레옹에 정복돼 막강했던 힘을 잃자 아르헨티나는 1816년 독립을 선포했고, 1820년 이곳에 대한 소유권도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이주민과 함께 관료와 수비대를 파견해 자국 영토화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광을 구가하던 대영제국이 이곳에 최초로 상륙했고 또 거주했던 기득권을 내세워 1883년 군사력을 동원, 아르헨티나를 축출하고 속령화해 버렸다.아르헨티나는 그 후 150여 년 동안 포클랜드 반환 문제를 가지고 영국과 협상도하고 유엔에 호소도 해 봤지만 냉혹한 국제사회는 이를 외면했다.

20세기 들어 아르헨티나는 정치적 대 격변을 겪는다. 1930년대 등장한 군부 정치 세력은 권력을 릴레이하면서 50여 년 동안 권위주의적 폭정을 계속했다. 그 결과 민심이 이반되고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져 81년 참모총장에서 대통령에 오른 ‘갈티에리’ 정권이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위기에 몰린 갈티에리 대통령은 국민 통합과 실추된 정권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영토 회복의 명분을 내세워 포클랜드 전쟁을 도발했다.아르헨티나 군부는 대처 총리가 이끌고 있는 영국이 작은 섬 하나를 되찾기 위해 먼 곳까지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군대를 보내지 않을 것으로 속단했다. 이뿐만 아니라 남미 특유의 남성 우월주의인 ‘마초이즘’으로 엘리자베스 여왕과 대처 총리, 즉 두 여자가 통치하는 영국을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노대국 영국은 건재했다. 철의 여인 대처는 단호하게 군사작전을 명령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엘리자베스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류 왕자가 자원해 가장 위험한 함재 헬기 조종사로 즉시 참전한다.항공모함 2척과 핵잠수함 등으로 구성된 43척의 기동 함대와 1000여 명의 해병부대가 주력이 돼 포클랜드 탈환작전이 개시됐다.

5월 1일 영국 항공기의 포트 스탠리 비행장 폭격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전이 개시됐다. 3일에는 핵잠수함 컹커러호가 어뢰 공격으로 아르헨티나의 최강 순양함 제너럴 벨그라노호를 격침시켰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4일 아르헨티나 공군기가 공대함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의 구축함 쉐필드호를 격침시키는 등 주고받는 혼전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될수록 우세한 무기체계와 첨단 지휘 통제시스템을 갖춘 영국군이 전장 주도권을 장악, 결국 개전 75일 만인 82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가 항복함으로써 포클랜드 전쟁은 끝을 맺었다.

힘을 앞세워 약한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넘보는 강대국들의 오만함은 마땅히 지탄받아야 한다. 다만 그들의 막강한 힘은 영국의 앤드류 왕자가 보인 것처럼 결사보국의 국민정신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구촌은 아직도 정글의 윤리가 지배하고 있다.


'철의 여인'과 포클랜드 전쟁



영국의 경제장관은 포클랜드로 파병할 예산조차 없다고 대처수상에게 보고했다.


고성혁(견적필살)



 

영화 철의 여인을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포클랜드 전쟁에 대한 마거랫 대처수상의 단호한 태도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침공하자 미국은 영국과 아르헨티나간에 중재에 나섰다.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은 헤이그장관이었다. 대처 수상은 미국 헤이그장관에게 이렇게 다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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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 사령부를 방문한 마그렛 대처 수상

우리(영국)보고 타협하라고 하는데 미국이라면 타협하겠느냐? 하와이가 일본으로부터 공격당했을 때 당신네 미국은 어떻게 했느냐? 도죠장군(일본의 도죠 히데키)에게 타협하자고 말했느냐?”

그러자 대처수상에게 전쟁보다는 타협을 종용했던 미국의 국무장관은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장면이다.

당시 영국의 경제사정은 최악이었다.

1978년 영국이 해군력의 상징이던 43,000톤급 항공모함 아크 로얄을 퇴역시키자 아르헨티나는 영국이 대규모 원정작전에 취약할 것이라는 판단하였다. 또 이 해역 대륙붕에 매장된 석유와 전진기지로서의 전략적 가치가 탐이나 198242일 아르헨티나 군이 포클랜드의 수도 포트 스탠리에 상륙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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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전쟁에 투입된 양국의 군사력

당시 영국의 경제장관은 포클랜드로 파병할 예산조차 없다고 대처수상에게 보고했다. 영국 해군제독은 포클랜드를 탈환하려면 지금 즉각 병력을 파병해야 한다고 하자 대처수상은 즉각 파병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영화장면에선 파도를 해치고 항진하는 영국함대가 나왔다.

실제로도 그랬다.

헨더슨 미국 주재 영국대사는 워싱턴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헤이그 국무장관을 연쇄접촉하며 영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지지를 부탁하나 만족할 만한 성공을 얻는데 실패하였다. 미국은 전쟁보다 평화적 해결을 원했고 이런 미국의 태도에 대처수상은 크게 실망하였다. 미국의 국무장관 헤이그가 제시한 타협안은 첫 번째, 포클랜드 주변에서 양측의 군대 철수, 두 번째 중립적 행정관의 임명,, 세 번째 시간을 두고 정착지 협상으로의 방향이었다. 영국으로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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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종식의 두 거두 레이건대통령과 대처수상

당시 미국은 이란인질사태 후유증과 소련의 아프간침공문제로 영국의 문제에 개입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아르헨티나는 영국의 경제악화와 국방비감축 그리고 미국의 외교안보상황의 취약점을 노렸던 것이 포클랜드 전쟁이었다.

모든 협상이 결렬되자 19824월 말,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더 이상의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자 영국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다. 전쟁 도발자를 아르헨티나로 규정하고 즉시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금수를 실시하였다.

영국은 국방비 감축으로 퇴역시켰던 항공모함 1척을 즉각 재취역시켰다. 영국에서 남대서양까지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서 초호화 유람선인 퀸엘리자베스까지 동원했다. 당시 영국은 항모 2척이 다였다. 그것으로는 헤리어 전투기 수송과 작전이 부족했다. 그래서 영국은 콘테이너선을 개조하여 헤리어 전투기를 작전에 투입했다. 헤리어 전투기가 수직이착륙기였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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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테이너선을 개조하여 항모처럼 운용했던 컨베이어함

전쟁을 선포한 영국은 잠수함에서 어뢰를 발사하여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라노호를 격침시켰다. 아르헨티나도 가만 있지를 않았다. 슈퍼에땅다르 전폭기에서 발사한 엑소세 미사일이 영국의 최신 구축함이었던 type42형 쉐필드함에 타격을 가했다. 미사일에 맞은 쉐필드 함엔 화재가 발생했다. 그 화재로 많은 영국해군 수병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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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선 철의 여인대처수상이 친필(親筆)로 전사자 유가족에 편지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를 키우는 똑같은 엄마의 입장에서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결국 영국은 전쟁에서 이기고 경제도 부흥하는 모습이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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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전쟁의 결과 : 영국은 전함 4척이 침몰하였고 10여척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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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영국의 구축함 코벤트리함

이명박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본다면 바로 이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대처 수상은 적의 침공에 즉각적이고도 단호하게 대응했다. 대처 수상은 미국의 미적지근한 대응태도에 오히려 분개했다. 하와이가 침공받았더라도 미국이 타협에 나서겠냐고 반문한 것이 그것이었다. 오히려 영국의 결전의지는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