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이야기/전쟁 이야기

역사: 1차세계대전 참호전투(1914년)

영일만2 2014. 9. 11. 06:53

 

 

역사: 1차세계대전 참호전투(1914년)



1차 대전중 1914년 9월마른 전투는 전쟁의 양상이 종래의 대열 행진과 정면충돌의 결전에서 악몽 같은 참호전으로 뒤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 연합군의 마른 공세로 인하여 단기간의 승리를 거두는 데 실패한 독일군은 일단 후퇴하여 스위스 접경 벨포트에서 북해에 이르는 전선을 따라 철통같은 방어선을 구축했다. 첫 5주일 동안에 전투에서 빼앗은 벨기에와 프랑스 영토를 고수하기로 결심한 그들은 정교한 참호선과 지하 통로, 대피호와 철조망 뒤에서 수비 태세에 들어갔다.

참호전은 교묘한 착상의 독창적인 전법이었다. 또한 엄청난 살육을 가져오는 전쟁 방식이었다. 참호에 들어박힌 독일 병사들은, 할 수 없이 자기네가 파놓은 참호 속에서 뛰어나와 대치한 양군 사이의 무인 지대를 가로질러 진격을 시도하는 연합군의 공격 부대를 조준 사격으로 쓸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히 퍼붓는 기관총과 박격포, 야포의 사격으로 목표 지점에 도달해 보지도 못하고 모든 연대 병력이 궤멸하기 일쑤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참호에서 지키고 있는 수비 부대의 인명 피해는 처음에는 비교적 경미했다. 영국군의 한 이등병은 “참호를 방어하는 10명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50명의 공격을 쉽게 저지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독일군의 방어선이 두터운데다 적의 포 공격으로 황폐화된 무인 지대를 건너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불렸다. 그러나 독일군의 전선이 연합군의 방위 진지 쪽으로 불쑥 튀어난 돌출부에 다소 취약한 점이 있었다. 프랑스군과 대영 제국의 군인들은 정면 공격이 아닌 협공을 할 생각이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지휘관들은 바로 그런 지점에서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다 줄 대돌파 작전을 펼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양국의 지휘관들은 새로운 전쟁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는데, 당시 지휘관들에게 전쟁이라는 개념은 나폴레옹 전쟁의 워털루 전투와 그 이전 사태의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대부분의 일선 장교들은 기병에 의해 수행되는 돌격전을 열망했다. 러일 전쟁보어 전쟁에서 새로운 병기들의 활약상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기계보다는 사람을 더 믿는 이러한 생각은 특히 영국, 프랑스 군에서 두드러졌는데,

조프르원수는 1912년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전통을 회복한 프랑스 군대는 이제 공세 이외의 다른 어떤 법칙도 모른다 (...) 적을 섬멸하기 위해 보병을 적진에 돌진시키겠다는 확고한 결의 속에서 극단적으로까지 수행될 것이다 공세에 대한 이러한 광신적이기까지한 믿음은 1907년의 영국 기병대 훈련 교범에서 절정에 이른다 라이플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해도 말의 속도, 돌격의 매력, 차가운 강철의 공포가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을 원리로써 인정해야한다.

이러한 연합군 장성들의 생각은 곧 엄청난 양의 소모적인 돌격전을 불러왔다. 1914년 9월경에 프랑스에서 펼쳐진 오트뫼르트 전투에서는 생레오나르 - 쉬르 - 수쉬의 반격전에서 모든 공격 연대가 평균 800명의 사망자를 냈다. 1915년 6월 6월 아르곤 공세에서 바가텔 구역을 담당한 제3군 소속 제 8보병대대가 대령 한명, 위관장교 3명, 200명미만의 사병으로 줄어드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당시 제3군 사령관이였던 사라이(Sarrail) 장군은 상부로 보내는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1월 8일 이후로 우리 군대는 아르곤에서만 군단의 절반에 이르는 숫자인 장교 1,200여명과 사병 8만 2천여명을 잃었다.

하지만 1915년 영국군 사상자 규모는 훨씬 더 심각했다. 1915년 4월 이프르 2차 공세 과정에서 제149여단은 장교 42명 사병 1,912명을 잃었는데, 이는 전체 부대원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규모였으며, 제10여단은 장교 73명과 사병 2,346명을 잃고 사실상 전멸했다. 이보다 한달 후인 5월 오베르 고지 전투에서 10개의 독일군 중대와 23정의 기관총이 3개 여단 전원이 투입된 공격을 깨끗하게 분쇄했다. 이후 9월에 발생한 루스 전투의 괴멸 상황은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이였다 최초 전투 개시 2시간만에 영국군은 1945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하루 동안 연합군측의 육해공 3군이 잃은 병력보다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 15사단은 병력은 60퍼센트를 잃었고 휘하 대대 대부분이 이름만 남은 상황으로 전락했다. 전투 둘째 날 1만명 수준으로 편성된 12개 대대가 공격을 단행했고, 교전 3시간 반 만에 그들은 장교 387명 사병 7,816명을 잃었다.

1916년 7월 1일 솜 공세 첫날에 벌어진 사상자 수는 정말이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제8사단 소속의 두 개 연대 전체가 오비예 주위로 포진한 독일군 기관총 사수들에게 몰살당했는데, 전투개시 1시간여만에 이 사단은 장교 300명 가운데 230명을 사병 8,500명 중 5,812명을 잃었다. 이에 맞선 독일군 수비대는 300명 미만의 병력을 잃었을 뿐이였다. 전투 개시 이후 2주차까지 영국군은 매일 1개 사단규모인 1만 명의 병력을 잃고 있었다. 이후로도 하루 평균 사상자 수가 2,500명 선이었다.

연합군 지휘관들은 흔히 독일군의 임무를 단순화 해주었다. 당시 장병들을 무인지대로 내몰기 위해서 철조망 제거작업이 필요했는데, 당시 한 군인이 말한 것처럼 우리편의 공격을 광고하는것과 다름없는 행동이다. 돌격 몇일전에 진로가 개척되었고 현저하게 이목을 끌었다. (...) 기괸총 사격이 치명적인 정확성 속에서 이루어진것이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물론 연합군 지휘부가 자기들보다 월등히 우세한 독일의 참호포와 방어 시설을 유린할 수 있는 공격 전략을 개발했다면 교착 상태는 좀 더 일찍 타개됐을는지도 모른다. 당시, 임기응변으로 모든 지휘를 맡아서 했기 때문에 지휘 능력과 활용도는 극히 떨어졌으며, 이에 따라 엄청난 인명 피해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은 ‘탱크’와 ‘항공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첫선을 보인 때는 1916년 솜 전투에서였다. 그러나 성능은 보잘것없었다. 탱크가 독일군 참호 전지 공격에서 위력을 발휘한 때는 1918년 여름이었다. 그때까지도 탱크는 여전히 느렸고, 기계는 믿을 수 없었으며 조작하기도 어려웠다. 초기에 항공기는 정찰 임무와 포격을 위한 관측용으로만 이용되었지만, 탱크처럼 항공기도 느렸으며, 보병 화기로도 쉽게 공격할 수 있었다. 또한, 화력과 정확도도 신통하지 못했다.

독일군은 초기에 훈련된 병력과 장비, 특히 기관총에서 유리했다. 그리고 그들은 영국과 프랑스군보다 참호전에의 적응이 빨랐다. 게다가 독일군은 그들의 방어 진지를 십분 활용했다. 독일군이 3년 동안 이 참호전에서 방어 위주의 전략을 포기한 것은 1915년 4월 제2차 이프르 전투1916년 2월 베르됭 전투, 단 두 번뿐이었다.

1914년 9월의 마른 전투 후에 몰트케 장군의 후임으로 독일군 총사령관이 된 에리히 폰 팔켄하인 장군의 지휘 아래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는 유리한 방어 전략을 채택하는 한편, 러시아군을 상대로 한 동부 전선에서는 성공적인 공세를 펴고 있었다.

영국군 야전 사령관 존 프렌치 경이 프랑스군 참모총장 조셉 조프르 원수의 지휘를 받게끔 되어 있던 연합군의 전략은 플랑드르 저지대와 베르됭을 잇는 독일군의 방어망의 불쑥 튀어나온 커다란 돌불부 측면에 대하여 영국군과 프랑스군 양국군이 협동 공격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은 1915년 한 해 동안 내내 돌출부 남쪽 측면이 상파뉴 측면에 대하여 공세를 취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아르토와 돌출부 북쪽 측면에 가해진 연합군 양군의 협동 공격도 역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2월과 3월에 걸쳐 프랑스군은 상파뉴에서 폭이 1.5킬로미터도 채 못 되는 지역을 탈환하느라고 24만 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영국군은 벨기에 국경 부근 뇌브샤펠에서 그보다 더 조금 진격했다. 영국군은 1킬로미터를 전진한 3일 전투의 첫 3시간 동안에 1만 명 가까운 병력을 잃었다.

4월 중순 독일군은 벨기에 국경 바로 너머에 있는 이프르를 공격했는데 이때 최초로 염소 가스를 무기로 사용했다. 프랑스 방어군은 숨이 막히게 하고 눈이 멀게 하는 그 무서운 가스 앞에 무더기로 쓰러졌지만, 독일군은 그들의 유리한 입장을 이용하는 데 실패했다. 그 후 양측은 더 효과적인 독가스를 개발하여 1915년 중반 이후로 양측이 예비 포격에 쓴 포탄에는 여러 종류의 화학 가스탄이 들어 있었다.

5월과 6월, 프랑스군은 큰 희생을 무릅쓰고 아르토와 수세에 공격을 가했으나 실패했고 영국군은 뇌프샤펠 남쪽의 페스튀베르에 공격을 가했다. 연합군은 9월 대공세를 계획하고 그에 투입할 새 병력을 훈련시키는 데 여름을 거의 다 보냈다. 9월 25일 프랑스군은 상파뉴에 파고든 독일 방어선에 일대 공세를 가했고 영불 연합군은 아르트와에서 공격을 전개했다. 아무런 전과도 없이 11월 초에 전투는 끝났다. 양측이 다 큰 인명 피해를 입었다.

9월 아르트와의 로스 전투에서 패전한 다음 영국군 사령관 프렌치 원수는 물러나고, 부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이 그 자리에 앉았다. 프랑스는 거듭된 패전으로 르네 라파엘 비비아니 내각이 무너지고 아리스띠드 브라잉이 수상이 되었다. 전쟁 노력을 가일층 강화하기 위하여 영국은 10월 더욱 광범위한 모병 제도를 도입하여 1월 드디어 전 국민 모병제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영국은 무기와 탄약 생산에도 박차를 가했다.

1915년 12월, 연합군 지도자들은 프랑스에서 회동했다. 1916년 여름으로 예정된 전면 공세 계획을 토의하기 위해서였다. 그 계획에 따르면 영국과 프랑스는 서부 전선에서, 러시아와 이탈리아는 동부 전선에서 각각 공격을 가하되 전선에서 상호 전선 노력이 뒤따라야 했다.

1915년 5월에 이미 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 포고를 했는데 그에 앞서 이탈리아는 런던 비밀 협정에 조인했다. 그 조약에서 연합군 측은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가담하여 참전한다면 그 대가로서 종전과 동시에 오스트리아 영토를 분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16년 8월까지 이탈리아는 독일에 대한 선전 포고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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