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캄보디아의 급진 좌익 무장단체 크메르 루주가 게릴라전으로 우파인 론 놀 정권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뚜올 슬랭(Tuol Sleng)과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설명되는 대학살극이 연출된 것이다.
앙코르 제국의 영광을 이어받은 캄보디아는 19세기 중엽부터 서세동점의 거센 북서풍에 휘말려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는 불행한 역사를 맞게 된다. 그리고 그 후 100여 년간 프랑스 지배 하에 인도차이나 수탈의 거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독립을 쟁취한 캄보디아는 한때 국왕이었으며 총리 겸 외교장관을 지낸 노르돔 시아누크가 국가원수가 돼 중립외교와 국정 쇄신을 통해 인도차이나의 대혼란 속에서도 자국의 안위를 지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비극의 역사는 캄보디아를 비켜가지 않았다. 70년 3월 시아누크의 소련 방문을 틈타 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친미 우파 론 놀이 쿠데타를 일으켜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대통령에 오른 론 놀이 친 서방 정책을 추구하자 당시 농촌·산악지대를 근거지로 공산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크메르 루주가 폴 포트의 지휘 하에 프놈펜 정부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크메르 루주의 공격은 73년 게릴라 기지에 대한 미국의 대대적인 공중 폭격으로 한때 움츠러들었으나 베트남에 주둔했던 미군이 철수하자 다시 공격을 강화해 마침내 75년 4월 17인 프놈펜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사회주의 혁명을 내세운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의 대량 학살과 강제 이주가 시작됐다. 그들이 통치한 3년 7개월 동안 200만 명이 넘는 무고한 양민이 학살당했고 300만 명에 가까운 도시민들이 농촌으로 강제 추방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크메르 루주의 대학살은 당내의 사소한 의견 충돌에서부터 시작됐다.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폴 포트가 캄보디아 공산당 창당 기념일을 정할 때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 두 명의 공산당 고위 간부를 당 지도부를 배반했다는 죄목으로 체포, 처형해 버렸다.
자신의 위치에 불안을 느낀 폴 포트는 당을 해치는 악덕 세균분자의 색출을 지시했다. 그는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 당내 반혁명 분자, 전 정권의 관리와 군인, 전직 교수 및 교사, 지식인, 의사와 약사, 중산층 등을 악덕 세균으로 지목했다.
심지어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학생, 안경을 쓴 사람, 손에 못박이지 않은 사람, 외국 서적을 갖고 있는 사람, 양담배를 피웠던 사람들까지 각지에 설치한 심문 센터로 끌고가 처형해 버렸다. 놀랍게도 이들의 처형에 앞장선 자들은 12~16세 정도의 어린 농민들로 혁명전쟁에서 맹위를 떨쳤던 크메르 루주 군의 첨병들이었다.
이때 처형된 시체들은 구덩이 속에 무더기로 매장됐다. 특히 프놈펜의 한 고등학교를 개조해 설치한 악명 높은 심문 소 뚜얼 슬랭과 그곳에서 처형된 시체들을 매장한 프놈펜 교외의 이른바 ‘킬링필드’는 당시의 참혹했던 비극과 만행을 그대로 설명해 주고 있다.
기고만장한 프놈펜의 폭군 폴 포트 정권은 베트남 영 일부 도시를 점령하는 등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78년 베트남군의 총공격을 받아 지리멸렬됐고 폴 포트도 북부 산악지대로 도피해 다시 게릴라로 돌아갔으나 98년 태국 국경의 정글 속에서 구차하게 생을 마감했다.
인간의 잔혹함이 여기에 이르리라고는 가인도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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