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이야기/전쟁 이야기

역사: 6일 전쟁(1967.6.5)

영일만2 2014. 9. 8. 06:22


이스라엘 공군기 이집트 기습 공격

1967년 6월 5일 오전 7시 45분 이스라엘 공군기가 이집트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제3차 중동전쟁인 ‘6일 전쟁’이 시작됐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의 충돌에서 비롯됐다. 시리아는 66년 아랍의 맹주이자 현대적 군사력을 갖춘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고 앙숙 이스라엘에 강경하게 맞서기 시작했다.

64년 4월 이스라엘이 1차 중동전쟁 정전협정에 따라 비무장지대로 설정된 골란고원 일대에 농작물을 경작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이때부터 골란고원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랍 게릴라들의 공격이 점증되자 67년 4월 시리아 내에 있는 게릴라 기지에 대대적인 군사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시리아는 이집트의 개입을 요청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다시 공격한다면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요르단·이라크와 군사동맹을 체결, 대 이스라엘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이러한 사실을 포착한 이스라엘은 즉각 전시체제에 돌입했다. 국방상 모세 다얀 장군은 이집트를 위시한 아랍 측의 전력이 수적으로 절대 우세하기 때문에 선제 기습공격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공세전략을 수립했다.

한편 아랍 측은 방대한 군사력에 비해 이를 효과적으로 통합 지휘할 수 있는 체제가 돼 있지 않았고 그럴 능력조차 없었다. 다만 10여 년 동안 사막지대에 설치한 지뢰와 토치카, 그리고 지하 벙커 등 방어시설에 의존, 이스라엘을 봉쇄해 압박을 가하는 장기 전략을 추구하고 있었다.

6월 5일 아침 전격적으로 실시된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작전은 아침 안개가 걷히고 주요 지휘관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이뤄졌다.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23개소의 아랍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지중해를 멀리 우회, 알렉산드리아쪽 리비아 사막지대 상공을 통해 카이로 지역으로 돌입해 들어갔다.

잔잔한 지중해상의 저공비행은 조종사가 하늘과 바다를 혼동해 방향을 상실, 추락의 위험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공군은 해상 100m 정도의 저공비행으로 사막지대에 분산돼 있는 이집트의 각 공군기지에 성공적으로 접근, 기습을 완벽하게 달성했던 것이다.

이 기습작전으로 이집트 공군은 불과 개전 하루만에 MIG - 21 90대를 포함, 총 410대의 항공기가 날아보지도 못한 채 지상에서 파괴당해 사실상 궤멸됨으로써 이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항공기가 전쟁에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가장 완벽한 작전이라고 평가되는 이 기습작전은 체코 출신 공군사령관 호도 소장이 심혈을 기울여 기획한 작품이었다. 특히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가 제공한 이집트 공군 조종사들의 가족사항에서부터 레이더 요원들의 근무 습관, 그리고 주요 지휘관들의 출근상황까지 세밀하게 분석한 완벽한 정보가 작전의 성공을 뒷받침했다.

시리아·요르단 공군도 단 25분 만에 무력화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지상군의 공격도 거칠 것이 없었다. 먼저 이집트에서 시나이반도와 스에즈 운하를 전격 장악해 버렸다. 요르단에서는 혈전을 강요당했지만 결국 예루살렘과 웨스트뱅크를 점령하고 승리한다. 그리고 시리아 전선에서도 골란고원을 장악하고 대승을 거둔다.

국토 면적이래야 우리나라 경상북도 크기와 비슷하고 인구는 고작 280만 명에 불과한 이스라엘이 아랍 14개국 1억500만 명과 싸워 이긴 것이다. 현대 전쟁사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6일 전쟁의 신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기적도 아니고 신화도 아니다.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 ‘국민이 곧 군대’라는 상무적 전통과 총력전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스라엘 국민의 안보의식, 그리고 희생을 각오한 장병들의 전승 의지가 이미 승리를 보장해 준 것이다.

정병 필승, 현대전에 있어서 대병주의는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다. 작지만 강한 군대, 그것이 바로 6일 전쟁이 우리에게 준 값진 교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