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이야기/역사 이야기

역사: #조선왕조실록 -(119) #경종"영조-16 #사도세자(9)홍국영

영일만2 2020. 6. 10. 13:13

역사: #조선왕조실록 -(119) #경종"영조-16 #사도세자(9)홍국영

사도세자는 자신의 친자식을 낳은 후궁도 죽였고 점치는 맹인도 죽였습니다.
여러 기록에 의해 객관성을 어느 정도 확보한 것만 보더라도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수는 오늘날 어지간한 연쇄살인범이 죽인 숫자보다 더 많습니다.

정조가 읽고는 제목을 “천유록”에서 “대천록”으로 직접 고쳐주었다는 책 속에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나옵니다.
-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백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다.(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 而烙刑等慘)

사도세자가 많은 사람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라는 점은 영조가 세자를 폐하며 발표한 폐세자반교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또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그날 밤 영조가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소리친 그 첫마디 역시 살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지 않았느냐(汝搏殺王孫之母)

또, 한중록에 의하면, 세자는 어머니인 선희궁 영빈 이씨의 내인을 죽인 사실도 나오는데, 어머니를 모시는 내인을 살해한 행위는 효를 강조하는 유교국가에서 용납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일은 점점 심각해져 심지어 친여동생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댔고 그 어머니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습니다.
- 요사이 그곳에 갔다가 거의 죽을 뻔 했는데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조선 왕 중 가장 오래 재위하면서 탕평책 등의 정책으로 신하들을 쥐락 펴락 했던 노회한 정치 9단 영조가 노론의 책략에 넘어가 또는 노론의 압박에 의해 자기의 친자식을 죽이는 결단을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영조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단순히 왕재를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 더 이상 왕족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이코패스 살인자를 그대로 살려 둘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영조에게 세자는 크게는 사직과 작게는 가문의 수치이자 암덩이였고, 이런 세자가 보위를 잇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단순히 폐세자 하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 후왕인 정조가 생부를 폐세자 상태로 두기도 어려울 것이고, 왕의 아비가 살인 행각을 벌일 경우 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즈음 세손(후일 정조)이 성군의 자질을 보였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입니다.

한편, 신하들 입장에서도 이러한 세자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왕이 되어도 그렇고 폐세자가 되어도 그렇고)

다만, 정조의 입장에서 생부가 희대의 살인마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참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즈음의 승정원 일기는 오려지고 세검정에서 씻겨 사라져버렸습니다.
오려지고 통째로 찢겨져 나간 곳이 100여 곳이 넘습니다.

승정원 일기 곳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합니다.
- 이 아래 한 장은 칼로 삭제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

담에 이어서~


#조선왕조실록 -(120)
#정조-1
#정조"등극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이유, 그 진실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길 없으나, 일단 지난 여러 회에서 살핀 바를 종합 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봅니다.

- 영조와 세자의 출발은 여느 왕과 세자와 다름이 없었다.

- 그러나 영조의 세자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컸고, 그 기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영조의 과도한 욕심으로 인해 실망으로 바뀌어 갔으며, 그 과정에서 세자는 정상궤도를 이탈하게 되었다.

- 결국 세자에게 정신질환이 생겼고, 세자는 그로 인해 세자 직의 유지는 물론 더 나아가 임금이 될 수도 없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 사직에 대한 부담과 절대권력에 대한 욕심이 매우 컸던 영조는 세자의 무너진 모습,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자질을 갖춘 세손의 등장에 갈등했고, 신하들은 물론 세자 본인도 이러한 분위기를 충분히 감지했다.

- 단순히 폐세자를 해서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 역시, 영조도, 그 어미인 종친도, 신하들도 잘 알고 있었다.

- 영조는 드디어 결단을 하고, 어미 영빈 이씨, 장인 홍봉한 등이 다른 길이 없음을 알고, 세손 등 여럿을 보호하기 위해 이에 동조하였다.

- 당쟁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 희생양으로 세자가 죽게 되었다는 것은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상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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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도세자의 참혹한 죽음을 목도한 열한 살 세손, 할머니가 청하고 할아버지가 명하고, 외할아버지가 도운 아비의 비극 앞에 권력이 얼마나 무섭고 비정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깨우쳤습니다.

어린 세손은 영조가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영조는 "조선에 너와 나 둘뿐이니 네 할아버지를 생각해 마음을 편히 갖도록 하라"는 전교를 했고, 세손은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영조는 세손에게 지난날의 참변은 대의에 따른 것이라는 점과 향후 이를 흔들지 말 것을 여러 차례 다짐 받았습니다.

영조는 임오화변 이후 14년을 더 살다가 1776년 52년을 재위 끝에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사도세자의 아들이 25세의 나이에 등극하니, 이 사람이 바로 흔히 개혁군주라 일컬어지는 정조 이산입니다.

담에 이어서~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조선왕조실록 -(123)
#정조-4
#정조시대"개막

보위에 오른 정조가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은 전회에서 본 것과 같은 척신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조가 세손 시절의 경험과 공부를 통해 깨달은 것은 과도하게 발호하는 척신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정치는 물론 임금의 자리도 위태해 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사헌 이계가 시동을 걸어주었습니다.
- 국정을 농단하고 전일에 전하의 대리청정을 반대한 정후겸을 역률로 다스리시고, 화완옹주를 내치소서.

정조는 이를 간압해 그대로 집행토록 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요구는 그게 다였습니다.
이에 정조는 분노했습니다.
-하찮은 정후겸에 대해서는 죄를 청하면서 기세가 하늘에 닿아 있는 자에 대해서는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니, 이런 대간들을 어디에 쓰겠느냐.

그제서야 몇 건의 홍인한 토죄 소가 올라왔고, 정조는 일단 홍인한을 유배조치하였습니다.

이어 홍인한 측근인 윤약연을 잡아들여 국문을 하자 윤약연은 뜻밖에도 홍국영을 해하려는 뜻을 갖고 있음을 실토하였습니다.

정조는 대노했습니다.
-국가의 안위가 호흡지간에 달려 있을 때 시종일간 과인을 보호해 간 이는 오직 홍국영 하나뿐이다.
이 사람을 제거하려는 계획은 곧 나의 우익을 제거해버리려는 흉심이다.

정조의 본심을 본 신하들이 앞다투어 토죄에 나섰고, 드디어 정조는 홍인한과 정후겸을 역률로 묶어 사사해 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대비의 오라비 김귀주가 홍인한의 사사 후 그 배후에 형 홍봉한이 있다며 그의 처단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척신 제거를 결심한 정조가 또 다른 척신인 김귀주의 요구를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습니다.

김귀주의 득세를 우려한 정조는 근거 없는 모함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김귀주를 유배조치하고, 홍봉한에게는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이로써 정조는 즉위 즉시 이렇다할 지원 세력도 없는 가운데 사도세자 장인인 홍봉한을 제외한 최강의 척신인 홍인한, 정후겸, 김귀주 등을 모두 정리한 것입니다.

정조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담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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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26)
#정조-7
#정조의"분신"홍국영-(2)

정조의 훌륭한 동지 홍국영은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도세자에 대해 불경했으며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죄를 물어 숙청했고, 정조의 외척 홍봉한 집안도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 제거했으며, 정순황후의 친동생 김귀주도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무너뜨리면서 권력의 정점에 섰습니다.

홍국영은 외척 세력을 배격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뜻을 충실히 실행했으나, 결국 자신이 스스로 외척이 되면서 위기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혼인한 지 16년이 되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비가 후사가 급하다는 이유로 빈을 간택하도록 하였습니다.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빈으로 밀었고 결국 간택되었으니 이가 바로 ‘원빈’입니다.

원빈이 아들만 낳는다면 홍국영의 영화는 영원히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지만 홍국영의 기대와 달리 원빈은 불과 1년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홍국영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결국 두어서는 안 될 무리수를 두고 말았습니다.

홍국영은 원빈이 죽은 후 새로 빈을 간택하자는 신하들의 의견을 힘으로 누르고,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인 상계군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 상계군을 완풍군으로 봉하여 정조의 후계로 삼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완풍군의 ‘완’은 전주 이씨, ‘풍’은 풍산 홍씨의 본관을 뜻하는 것으로, 왕손에 자신의 가문 본관을 들이밀었다는 데에 그 야심이 묻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홍국영은 누이 원빈이 세상을 떠난 후 정조의 비 효의왕후를 근거 없이 의심했고, 원빈이 독살당한 증거를 찾는다며 궁궐의 나인을 비롯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문초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정조가 드디어 나섰습니다.

1779년(정조 3)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에게 입조를 명했습니다. 이 날은 7년 전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 만난 날로서 홍국영도 정조의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습니다.

말 없는 정조와 한 참을 마주한 홍국영은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 오늘은 신이 전하와 길이 헤어지는 날이옵니다.
- 신이 한 번 금문 밖으로 나간 뒤에도 세상에 뜻을 둔다면 이는 나라를 잊은 것이니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직상소를 받아들인 후 ‘봉조하’(은퇴하는 원로대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직함)라는 직함을 내렸고, 그날로 홍국영은 그렇게 도성을 떠났습니다. 정조가 홍국영에게 내린 마지막 은혜였다면 은혜였습니다.

외척 세력을 철저히 배격하고자 했던 정조로서는, 그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왕위 계승에까지 개입하려는 홍국영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홍국영의 행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자 정조에 대한 배신이었으며, 정조의 정치 구상과 행보에서 치워내야 할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서른의 나이에 세상의 정점에 섰던 사내, 서른둘에 봉조하라는 기록을 세운 홍국영. 그는 그 이듬해인 정조 5년, 생을 짧고 굵게 그러나 참으로 허무하게 마감하였습니다.

담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