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 (33) #예종"성종-3
#예종의"죽음"성종의"등극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은 형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함으로써 세자가 되었고, 5년여의 세자 생활을 거친 후 등극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한명회 등 공신들이 정사를 농단하는 공신의 시대였는데, 온건한 성품의 예종은 등극하자 의외로 강하게 공신들을 압박하였습니다.
예종은 즉위 후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는 자가 있으면 공신을 불문하고 칼을 씌워 잡아와라”, “탐오 불법이 있다면 공신, 당상관을 가리지 말고 구금하고, 고문을 해서라도 진상을 밝혀라”는 명을 내리는 등 공신들을 장악하는 한편,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아울러 몇 년 안에 기어코 부왕인 세조를 능가하는 강력한 군주가 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예종은 실제 그럴만한 재주와 배짱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종의 이러한 꿈은 채 봉우리를 피워볼 수도 없었으니, 이는 예종이 그 전부터 앓고 있던 족질이 원인이었습니다.
예종이 앓던 족질은 지금으로 말하면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조선 8대 왕인 예종은 왕성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족질로 급격히 기력을 잃고 졸하니, 재위 1년 2월, 20세의 나이였습니다.
한편, 예종의 이러한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서는, 겨우 족질로 그리 쉽게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 개운치 않은 점 등을 이유로 공신세력에 대해 강경 정책을 펼친 예종에 불안감을 느낀 한명회 등 공신세력과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경세자의 부인이 독살한 것이라는 얘기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예종이 죽은 후 후계자를 결정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3명의 대상자가 있었습니다.
먼저, 죽은 예종의 아들인 원자(제안군)인데 나이가 겨우 4살에 불과하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가 남긴 아들 중 첫째인 월산군과 둘째아들 자을산군이었습니다.
자을산군은 후계서열로는 3위이지만 결국 이 아이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이 아이의 장인이 한명회라는 점이 크게 고려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을산군의 어미가 진즉에 한명회의 4녀를 며느리로 들인 덕을 톡톡히 보게 된 것입니다.
또한, 후계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대왕대비(세조의 부인)도 실질적 권세가인 한명회가 새 임금의 후원자가 되는 것이 종묘사직을 보존하는 길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열두 살에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선 8대 임금 성종은 세종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임금다운 임금이었습니다.
성종은 할머니의 수렴청정을 거친 후에도 인수대비의 간섭, 한명회 등 공신들의 득세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시간은 나의 편이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가다듬기에 힘쓰니,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건 자연의 이치인지라, 자연스레 성종의 치세가 열릴 수 있었습니다.
성종 치세에는 이렇다 할 외침이나 역모도 없는 가운데 수많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으나, 성종에게도 다른 선대 왕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불행이 닥쳐왔으니, 이는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폐비윤씨, 그리고 연산군으로 이어지는 잔혹사였습니다.
담에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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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35)연산군 일기 초반모습
#연산군일기-1
#연산의"초반"모습
세자시절의 연산은 양녕대군 같은 문제아도 아니었고, 아버지 성종 같은 모범생도 아니었으며, 그저 소리 없이 적당히 하루를 보내는 특별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얼굴에 종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입안이 헐거나 눈병이 걸리는 등 잔병치레가 잦은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왕자같지 않고 삐리리한 모습에 별로 신경이 안쓰임)
연산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미인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 되었다고 <연산군일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세자 시절에 이미 어미의 일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만, 연산이 이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조정의 경계심 자극으로 인해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 있으므로, 일부러 모른 척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지혜로운 왕자였는데~/)
연산의 아비 성종은 모범군주답게 대간(고려~조선시대 감찰임무를 맡은 대관과 국왕에 대한 간쟁업무를 맡은 간관의 합칭으로 시정의 득실을 논하고 군주, 백관의 과실을 간쟁,탄핵하는 등 실세중의 실세였다)들의 입바른 간언(전하 아니되옵니다~~)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연산은 성종이 대간 등 신하들을 억눌러 제압하지 않는 것에 큰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연산은 성종의 굴복으로까지 보이는 부드러운 통치에 대한 반감과 아직은 가슴속에 눌러만 가지고 있는 폐비 윤씨의 일로 인해 속은 늘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산은 즉위하자마자 불교식 제사를 지내는 문제, 성종의 묘호를 정하는 문제 등에서 신하들 특히 대간들과 대립하였고, 이 과정에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강경책을 폈는데, 연산의 이러한 말이 갖는 무시무시한 의미를 이때는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연산의 강경책에 대간들은 연산의 버르장머리를 잡겠다는 듯이 유생들을 동원한 상소, 집단사직 등 더욱 강한 초강경책을 펴니, 아직 힘이 미미한 연산으로서는 분통터지지만 대간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연산은 즉위 4년까지 대간들과 사사건건 부딪쳤고, 그 때마다 대간들의 집단 사직, 복직이 이어지는 양상이었으며, 비록 겉으로는 대간들에 밀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와 같은 시간은 연산의 힘과 내면의 의지를 점점 강하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연산은 곧 터질 무오사화 전까지만 해도 권세는 임금에게 있어야 한다는 왕권에 대한 인식, 할머니인 인수대비의 눈치를 봐야 하는 등의 현실적인 힘의 관계를 잘 이해했고, 신하들 간의 세력 균형이 유지되도록 힘쓰는 한편, 국정운영에도 꽤 신경을 쓰는 등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판단력, 그리고 뚝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제법 카리스마 있는 유능한 군주가 될 자질을 보였던 것이지요
그동안의 연속극 등을 보면 연산군이 즉위하자마자 자기 어미의 복수를 한다고 마구잡이로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를 하나, 연산군은 실은 상당한 기간 동안 보통 이상의 선정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힘을 바탕으로 무오사화 등의 기회를 이용하여 절대군주의 자리에 자력으로 오르는 등 고도의 정치력을 보유한 군주로 보는 것이 적정합니다.
물론 연산군이 어미인 폐비 윤씨의 일에 대한 복수를 시작함으로써 스스로 무너지는 길을 택하게 되나, 이는 연산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어미인 중전을 폐해 사사까지 하면서 그 아들을 그대로 세자로 둔 성종과 인수대비의 업보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담에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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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36) 연산군 일기 무오사화 사화의 시작
#연산군일기-2
#사화(士禍),"무오사화의"시작
사화(士禍)는 조선시대에 조정 중신과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화(禍)를 입은 사건을 말합니다.
조선 개국 이래 세종 성종 등 임금이 문치(文治)에 힘을 쓰고 유학을 장려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선비들 사회, 즉 유림(儒林)은 활기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조, 성종 때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 주의, 사상, 향토관계 등으로 파벌이 생겼는데, 이를 크게 대별하면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입니다.
훈구파는 세조의 정난을 도와 높은 지위와 많은 땅을 소유한 일파로서 정인지, 신숙주, 이극돈 등이 그 일파입니다.
그리고 사림파는 경상도 출신의 대학자 김종직을 필두로, 그 제자인 정여창, 김일손 등을 중심으로 하는 일파로서, 사림파는 세조의 정난에 동의하지 않으나 기회가 오면 정부 요직에 들어가 포부를 펴보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훈구파와 사림파는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1차로 맞붙어 사림파의 선비가 무수히 죽는 사건이 일어나니 이것이 바로 연산군 시대의 무오사화입니다.
연산군 시대에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2차 사화가 또 다시 발생하는데 이것이 갑자사화입니다.
이와 같은 무오사화, 갑자사화와 더불어 후대의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합쳐 4대사화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정쟁은 크게 보아 훈구파와 사림파가 끝없이 대를 이어 대립하고 분파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이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는 불가피합니다.
지금부터 연산군 시대의 1차 사화인 무오사화를 간결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실록을 편찬하는 실록청의 수장 이극돈(훈구파)은 사초, 즉 사관들이 비밀리에 작성하는 실록 편찬의 기초자료를 살피던 중 자신에 대한 민망한 기록(불경을 잘 외운 덕에 전라관찰사가 되었다는 등)을 발견하고, 이를 작성한 사관인 김일손(사림파)에게 수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김일손은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극돈은 김일손이 쓴 사초에서 다른 문제의 기사를 찾아 볼 요량으로 사초를 자세히 보다가, “김종서, 황보인 등은 절개를 지키려다 죽었다”는 등 세조 집권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내용과 “세조는 아들인 의경세자의 후궁 권씨에게 관심을 가졌으나 권씨가 세조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는 등 세조를 비하하는 경천동지할 기록을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무언가 피바람이 불 것 같지 않습니까?
담에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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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40)
#연산군일기-6
#갑자사화(甲子士禍)"그리고"광풍
<연산군일기>에서는 갑자사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고, 드라마에서도 이와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 어느 날 밤 미복 차림으로 찾아온 연산에게 임사홍이 울면서 “모후께선 투기한 죄밖에 없사온데 엄숙의와 정소용이 참소하여 폐비와 사사에 이르렀나이다”라고 하자, 폐비를 닮아 모질고 어리석은 연산이 그날 밤 엄숙의와 정소용을 손수 죽였다.
그러나 임사홍의 집에 사관이 동석했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시점상으로도 연산이 어미의 죽음이 참소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한 때는 이보다 훨씬 앞선 때이므로, 이는 명백히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연산은 엄숙의와 정소용을 손수 때려죽인 후 “칠거지악이 있다 한들 그런 일이라면 버리면 그만이지 죽여야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아비인 성종의 뜻에 반해 폐비를 추승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폐비를 사사할 때 사약을 들고 갔던 이세좌(귀양 가는 중), 윤필상을 참하고, 죽어 묻혀있는 한명회, 정창손, 정인지 등을 부관참시하였으며, 특히 한명회와 정창손은 이미 해골이 된 머리를 효수되기도 하였습니다.
연산은 그 외 어미의 죽음과 연관된 사람을 몇 더 죽이고 유배보냈는데, 단지 어미의 복수라면 이쯤에서 마무리되었을 것이나 연산은 어기서 멈추지 않고 피바람을 뜻밖의 방향으로 확대시켰습니다.
연산은 연산 아래에서 영의정까지 지내고 죽은 인수대비의 4촌 오라비 한치형을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부관능지, 즉 시신을 꺼내 머리, 팔, 다리를 모두 자르게 하고, 가산은 모두 몰수하였으며, 자식들을 국문장으로 끌고 나와 죽기 직전까지 괴롭혔습니다.
무오사화에서 갑자사화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세 정승은 한치형, 이극균, 성준이었는데, 연산은 한치형에 이어, 이극균, 성준을 모두 죽이고도 모자라, 그 후 이들을 능지하여 팔도에 돌리는 한편, 머리는 따로 떼어 백관 앞에 효수하였다가 다시 이를 팔도에 돌리도록 하였다가 다시 해골을 빻아서 바람에 날려버리게까지 하는 등 사람의 길을 벗어난 폭정을 이어갔습니다.
이어서 이들의 집이 있던 자리는 파서 연못으로 만들고, 귀양에 그쳤던 부모, 형제, 자식, 사위들도 모두 참수하고, 과거 연산 즉위 후 입바른 상소를 올렸던 대간 등 연산에게 싫은 소리를 했던 대간들을 찾아 내 과거의 일을 이유로 모조리 참수하여 효수하였습니다.
이즈음 감옥이 모자라 잡아 온 이들을 바깥에 둘 수밖에 없었고, 고문으로 인한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날마다 새 얼굴이 장대에 꽂혀 걸리었으며, 대신들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지당하신 분부이옵니다”라는 말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담에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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