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굴기(大國崛起) 중국의 군사력과 동북아 헤게모니 변수
장 순 휘
(여의도연구원 정책자문위원)
중국의 민족성을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4자 성어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고 해도 실언은 아닐 것이다. 우공이산의 우화(寓話)는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어떤 큰 일이라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비유에서 유래한다.
이 우화의 출전은 열자(列子) <탕문편(탕問篇)>에 나오는 우화로서 태행산과 왕옥산 사이에 사는 우공이라는 90세 노인이 살았다. 이 큰 두 산이 왕래에 장애가 되자 우공은 산을 깎아 없애기로 하여 예주(豫州)와 한수(漢水)까지 곧장 길을 내기로 결심하고 판 흙을 등짐을 지고 발해(渤海)에 갖다 버리기 시작했다. 한 번 다녀오는데 1년씩 걸리니 사람들은 비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공은 눈 하나 깜짝도 안하고 자자손손 흙을 옮기다 보면 언젠가는 두 산이 없어질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산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진짜 놀란 것은 두 산을 지키는 사신(蛇神)이었고, 차라리 산을 옮겨 주는게 좋겠다고 옥황상제님께 보고를 했다. 옥황상제는 우공의 인내와 의지에 감동하였고, 힘의 신 과아(夸娥)의 두 아들을 시켜 각각 두 산을 들어다가 태행산은 삭동에, 왕옥산은 옹남에 옮겨 놓았다는 우화이다. 중국민족의 특징을 너무나도 잘 담고있는 얘기로서 ‘만만디([慢慢的)’와 더불어 대표적인 우화인 것이다.
오늘날의 중국은 냉전시대의 낙후성을 벗어난 지 오래되었고, 21세기 첨단시대를 열어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특히 군사력분야에서 과거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는 다수 병력의 재래식 전력이 아닌 최첨단의 막강한 정예정규군을 육성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최근 심각한 갈등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중국과 일본과의 댜오위다오섬(센카쿠섬) 영토분쟁에서 보여주는 중국 군부의 시위양상은 결코 단순한 무력시위가 아니라는 것을 역사 속에서 감지할 수 있다.
그 역사적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는 치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facts)이다. 1274년 충렬왕 원년 ‘여원연합군’ 33,000명과 전함 900척이 왜(倭)정벌을 위해 출정했다가 쓰시마 섬과 이끼섬를 점령하고 본토를 공격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태풍을 만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철수했고, 2차 원정 때에는 만반의 대비를 한 일본군의 저항이 심한데다 또다시 태풍을 만나 원정군은 10만의 병력을 잃고 실패했다. 충렬왕 20년(1294년) 3차 원정을 준비하던 원 세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왜국 정벌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후 선조 25년(1592년)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빌미로 침략전쟁을 도발하여 명나라와 연합으로 싸운 임진왜란도 결과론적으로는 강화를 요청한 명나라를 보는 일본과 제3자적 관점에서는 패전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894년 7월부터 1895년 4월까지 진행된 청일전쟁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었다. 한반도내에서 7월29일 성환전투 패전에 이어서 9월17일 아시아의 최강이며, 세계 8위의 전력을 자랑하던 청의 북양함대가 일본 함대를 상대로 화력이 우위에 있었음에도 선원들의 경험과 기동력의 열세로 참가한 10대의 군함 중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었으며, 850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당하는 참패를 당하면서 전황은 급격히 청나라의 패전으로 기울었다. 청나라의 요청으로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으니 이 또한 중국의 패전이라고 역사는 기록한다.
그리고 근대사에서도 중국은 1931년~1932년 만주사변(滿洲事變)과 1937년~1945년 중일전쟁(中日戰爭)에서도 사실상 일본에 참패한 역사적 아픔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청나라 말기 세계열강에 연전연패를 당해서 국권이 침탈당하는 치욕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제1차 아편전쟁(1839년~1842년)과 제2차 아편전쟁(1856년~1860년)에서 영국에 패전했으며, 6.25전쟁(한국전쟁) 즉 항미원조전쟁(1950년~1953년)도 결과론적으로 휴전을 유도하면서 15만 여명이 사망하고도 이긴 전쟁으로 볼 수 없다. 그후 1979년~1988년에 베트남과의 국경분쟁으로 시작한 중월전쟁에서도 베트남 침공의 전략적 목표를 포기한 채 일방적으로 철수하여 종전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베트남에 패전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아시아의 최대강국을 자처하던 중국의 과거사에서의 전쟁기록은 패전으로 얼룩진 치욕의 전쟁역사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의 종지부를 내릴 수 있도록 한 지도자가 바로 등소평(鄧小平)으로서 그는 1976년 마오쩌둥의 사후 중국사회주의체제의 안정을 기하면서 젊은 후계자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기다린다'는 뜻의 고사성어인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국가지도지침을 내려서 대외적으로 국제사회와의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 내부적으로 국력을 발전시키는 것을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삼도록 했다. 1990년대 “화평굴기(和平崛起)”라하여 개혁개방을 과감히 추진하면서 아시아의 주변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위장평화전술을 외교적 지침으로 지난 20여 년간 추구하면서 “도광양회”라는 국가의 목표를 완성하기 위하여 주도면밀하게 군사력 구축을 해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난 2012년 4월 16일 일본정부가 개인소유의 센카쿠섬에 대한 국유화계획 발표로 점화된 중국과 일본의 영토분쟁은 현재 양국간의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기 일보직전의 첨예한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다. 작년 9월 11일 일본의 센카쿠섬의 국유화 강행이후에 중국은 수시로 12해리 영해를 침범하여 이본의 영유권을 주장을 무시하고 있으며, 올해는 중국 해경국을 새로 발족하여 강력한 군사적 대응 불사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센카쿠섬을 정찰하는 중국의 무인정찰기를 격추할 수 있다고 한 것에 대하여 중국은 전쟁으로 간주한다고 맞대응한 상태인 점을 본다면 충돌의 직전의 단계라고도 할 수 있다. 더욱이 지난 11월 1일 일본 자위대가 실시한 육․해․공군 총 3만4천명이 참가한 대규모 상륙실전훈련은 중국과의 무력충돌을 상정한 연습이었으니 갈등의 골이 점점 더 깊어지는 양상이다.
과거와 달리 중국의 강경한 군사적 동향과 외교적 강경자세는 도광양회의 군사력과 함수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군사력은 과거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각인된 인민해방군의 구태의연한 군이미지와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무장력을 갖춘 세계 2위의 강군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중국은 2030년을 목표로 미국의 패권주의에 도전하고 있으며, 항공모함과 스텔스 전투기 분야의 독자기술을 개발을 완료하는 등 최첨단의 강대군 235만명을 보유하고 있다 것은 명실상부한 사실이다.
특히 해군력의 대일압박 강도를 높여가는 과정에서 중국 해군이 산동반도 칭따오에 기지를 둔 북해함대를 공개한 것은 1894년 9월 17일 패전한 청나라 북양함대의 역사적 계승부대로서 항공모함과 구축함 100여대와 항공기 30여대로 편성된 서해에 대한 군사장악력을 한국과 일본 양국에 공식통보한 바와 다름없는 군사적 준도발로 봐야할 것이다. 이번 북해함대의 공개는 중국이 일본을 상대로 댜오위다오섬 영유권분쟁에서 예상되는 해․공군력의 충돌을 염두에 둔 고도의 군사적 시위(Demonstration)라고 볼 수 있으며, 각골난망(刻骨難忘)해오던 일본에 대한 북양함대의 설욕을 벼르고 있다는 중국군의 적개심을 국내외에 알리고자 하는 선전포고성의 심리전을 병행한 개연성도 있다.
이처럼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중국의 정치군사외교적 행보는 이미 화평굴기(和平崛起)를 넘어서 중국의 본성을 드러낸 대국굴기(大國崛起)의 21세기 행보라는 본질을 직시하고 미래안보차원의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작금의 중국과 일본의 영토분쟁을 강 건너 등불 보듯이 바라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유념해야한다. 어쩌면 중국의 고도로 계산된 주변국 길들이기는 아닌지도 대관소찰(大觀小察)해야한다. 우리의 입장에서도 중국이 일본을 상대로 유사시 군사적 위협으로 동북아에서의 주도권(Hegemony)을 장악하겠다는 저의에 대한 정치군사외교적인 통합대응전략을 수립해서 과서 청국의 조선책략의 희생물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반면에 일본은 센카쿠섬에 대한 영토분쟁뿐 만아니라 독도에 대한 분쟁을 유발하면서 정권마다 반사이익(反射利益)으로 안정적 내정을 챙기는 속좁은 꼼수정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으로서 인류사회에 저지른 죄과가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전범들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참배(神寺參拜)를 강행하여 아시아 전쟁피해국들에 대한 사죄와 반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와는 독도영유권분쟁을 지속적으로 촉발하고 있으며, 중국과는 지금 댜오위다오섬에 대한 영토분쟁으로 주변국을 긴장국면으로 몰아가는 강경일변도의 정치군사외교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직시해야 할 것은 일본의 이러한 행위에는 미일동맹에 근거한 일본 나름대로의 현대화된 군사력의 뒷받침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월 27일 일본은 중국 무인정찰기의 센카쿠에 대한 영공침범 시 격추할 수 있다는 방침을 발표했고, 중국에 이에 대하여 전쟁으로 간주한다는 강경대응 발언을 함으로써 언제라도 무력충돌이 가능한 분위기가 된 것도 자위대 군사능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군사적 자신감은 지난 11월 1일 일본은 병력 3만4천명과 함정 6척, 항공기 380기 등이 참가한 대규모 상륙탈환작전연습을 강행하였고, 이 훈련이 센카쿠섬이 중국군에 점령당했을 경우를 상정하여 실전수준으로 실시한 의도된 군사훈련이었다. 더욱이 전후 평화헌법으로 유지해온 현 국가체제에서 ‘집단권자위권’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 역시 우리의 입장에서도 결코 좌시 할 수 없는 일본사회의 우경화 행태인 것이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반대한다고 했고, 미국은 방위력강화차원에서 지지하는 의견을 발표했다. 반면에 우리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의견을 유보하고 있으나 조만간 발표해야할 중요한 외교적 의견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의 입장에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보유가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 과연 어떠한 의견이 나올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사실상 주권국가의 기본권적인 군사행위 영역일 수 있지만 상대가 전범국 일본인지라 재해석이 불가피한 것이 사실이다.
한반도의 안보차원에서만 고려한다면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의 차원에서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이 우리의 안보적 차원에서는 유리한 측면이 있다는 게 사실이다. 국가의 위기라는 것이 단순한 수치적 갈등이 아니라 복잡하고 미묘한 총체적 사태로 촉발되는 경우이기에 주적(主敵)인 북한의 군사적 도발능력을 전제할 때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은 초유의 위기사태 시에는 연합예비전력으로서 가치를 고려해볼 수 있다.
일본의 군사력 증강과 집단적 자위권 보유가 미국의 서태평양에서의 군사적 부담을 덜고, 중국과 북한의 무모한 도발에 대한 억제력으로 선순환의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6.25전쟁 시 낙동강전선으로 몰렸던 백척간두(百尺竿頭)의 국가 존망 위기에서 유엔군의 집단적 자위권이 없었다면 과연 대한민국이 생존할 수 있었을까하는 악몽을 떠올려본다. 따라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은 중장기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재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양해가 한․일 군사동맹의 전제나 지향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아의 정세는 격랑의 시대를 앞둔 태풍전야라고도 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중․일 영토분쟁으로 인한 국지적인 군사적 충돌이 예상되고, 그 승패에 따른 동북아시아의 주도권 판도가 변화할 것이라는 것이다. 남북한 관계도 이 연계선상에서 변화가 불가피하며, 만일 중국이 승전한다면 결코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군사적으로 자신감을 얻은 중국은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이 결과는 북한에게도 군사적 도발을 자극하는 변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일본이 승전한다면 중국은 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치명적인 상처를 안게 될 것이다. 특히 미국의 참전여부가 확전의 결정적인 단초인데 미국은 확전으로 중동에 이은 아시아의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꺼리는 차원에서 적극적인 조기중재로 확전을 방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중국과 일본의 댜오위다오분쟁은 국지전으로서 양국의 자존심 싸움수준에서 중재될 것으로 예상되나 전쟁의 결과에 따라 한반도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주도권의 판도는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진단할 수 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전쟁전후의 정세분석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여 국가안보의 유리한 국면으로 준비를 하고, 북한의 경거망동을 억제하는 전략은 한미 동맹 공조를 확고히 하고 대북 경계 및 전투준비태세에 추호의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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