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이야기/국방 이야기

1212. 국방: 월남전쟁과 한국군(10.14 월)

영일만2 2013. 10. 14. 11:49

 

1212. 국방: 월남전쟁과 한국군(10.14 월)

 

-이번 칼럼요약-

2013년 10월 14일 월요일 월남전쟁과 한국군, 월남 전쟁사등에 대해서 써봅니다.

 

-본 문-

1. 베트남 전쟁의 이해

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베트남,중공:프랑스)

1800년대 나폴레옹시대 이후 베트남은 오랫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다.

프랑스는 학교, 병원등은 세우지 않았고, 감옥을 먼저세웠으며, 즉결처분등이 많았다고 한다.

하여튼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일본의 침략으로 물러났던 프랑스는 일본이 물러나자

자신의 지배권을 주장하고 다시 베트남에 주둔하며, 그들의 무자비한 통치에 분노해왔던

베트남인들은 호치민과 지엠등을 중심으로 프랑스와 싸우게 되는데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1954/베트남,중공:프랑스)였다.

1946년 11월 프랑스의 하이퐁 항구에 대한 함포사격으로 최소한 6,000명의 베트남시민이

사망함과 동시에 베트민(1941.5월 호치민이 결성/항일, 항프전수행) 베트남의 하노이공격으로

양측이 협상을 포기하게 되었고,  사실상 전면전을 시작했는데, 도시는 프랑스군이 점령했으나,

수시로 기습공격을 당해 피해가 막심했고, 이런 상황에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해,

베트남보다는 소련의 지원을 얻은 북한공산세력과의 대결이 중요한 미국은 지원을 끊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반전여론에 추가 참여를 꺼리는 미국과 달리 중공군은 베트남을 직접적으로 지원한다.

1953.5.11 프랑스군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고, 프랑스 군대 1만명이 5만명의

베트남군과 중공군을 상대로 "디엔비엔푸"전투에서 눈부신 선전을 했으나, 탄약등이 고갈되어

5000여명이 전사하였꼬, 나머지는 전원이 항복함으로서 1차 인도차이나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끝이 났다.

 

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1955~1975/베트남:미국, 한국등 7개국)

1955년 월남공화국 성립하여 반공법을 시행하고, 더이상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위한 미국의 지원이 시작되었다.

1961년 미국 정규군 최초로 파견한후 1964.8.4 미국해군함이 북베트남의 어뢰정공격 사건인 통킹만 사건으로

본격적으로 미군이 개입하였다. 많을때는 54만명 철수할 무렵에는 33만명의 미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

결정적으로 1968.1.31 배트콩들이 사이공 미대사관을 비롯한 미군시설들에 대한 대규모 공격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에 이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대낮에 자신들의 안방인 대사관이

함락되는 모습을 텔레비젼으로 보며 경악을 했고, 그때부터 반전여론이 일어 존슨대통령이물러나고,

닉슨대통령이 들어서며, '닉슨 독트린'을 새로운 안보, 외교전략으로 내세우며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를

주장하였고, 1975년 북베트남의 대규모 공세로 사이공이 함락되고, 즈엉반민대통령이 항복함으로서 전쟁은 끝났다.

이전쟁에는 미국으로 부터 6.25 전쟁 빚이 있는 한국을 비롯해, 혼자서는 안보를 보장할수 없는

호주와 뉴질랜드, 공산화의 위협에 노출된 태국, 필리핀등의 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함께 하였다.

 

다.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1979~1988/베트남: 중공)

1978년 초부터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분쟁이 일어난데 이어 5월에는 베트남에 거주하는

중국계 주민과 화교의 대량추방을 둘러싸고 중월간대립이 이어졌고, 중국 윈난성 및 광시성의

 국경지대에서 군사충돌이 발생하였다.

1979.2.17 중공군은 선전포고 없이 베트남을 전면 침공하였고, 베트남도 이에 응전 베트남 북서부의

지방도시와 요충지대는 격전장으로 변했다. 중공군은 상당한 고전을 겪었으나 국경부근의 베트남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지방도시를 제압한다음, 3.5 자위반격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명분으로 철수하여

3.6 철수를 완료하였고, 1988.1 국경전쟁 종식에 합의하였으나 상호 영유권을

주장하는 난사군도에서 다시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양국분쟁은 1989.9 베트남에서

캄보디아 철군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라. 전쟁결과

세번의 인도차이나 전쟁결과 프랑스와 미국, 중공을 물리친 베트남은 남중국해를

놓고 벌어지는 대결에서도 중국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자신감으로 살고 있다.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은 여러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시 세계 최대, 최강인 미국이 최초로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점과,

민족독립운동이 승리하였기 때문에 결국 민족 독립투쟁의 정당성과 강인성이 실증되었다는 점이다.

 

2. 한국군의 활약

전투사단으로 해병대인 청룡부대, 맹호부대(수도사단), 백마부대(백마사단)이 파병되어

전투임무를 수행하였다. 생존률은 100분의 1.5%로 100분의 1.9%인 미국에 비해서,

피해병력이 적었으나, 활동 실적은 인원에 비해서 30%정도 더 많이 적군을 사살하거나,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1964.5부터 1973.3.14까지 총 312,823명의 장병들이 월남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소탕작전을

하였고, 5000여명의 한국군이 전사하였으며, 수많은 병사들이 아직까지도

고엽제등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월남전에 파병된 병사들에게 1967년부터 M16소총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한국군은 베트남전을 계기로 기갑여단 창설, M16 소총으로 전환, 호크, 나이키등 미사일 부대창설,

F4팬텀기 전력화, 전투경험 축적과 전술교리 습득등 많은 실익을 얻을수 있었다.

하사관은 하루에 2달러를 월급으로 받았단다. 그래서 고스란히 국내에 들어갔는데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고 한다.

 

3. 오작교 작전

백마부대와 청룡부대가 남북으로 이어진 1번국도를 이어주는 어느지역을 십여년간 베트콩이 점령하고

있어서 아군의 보급로가 끊겨져 있었는데, 백마와 청룡이 동시 작전을 펼쳐서 고지에서

만나 오작교 작전으로 불리우고 있다.

 

4. 중대전술기지

베트남은 북베트남이 전격적으로 침공하기 전에는 따로 전쟁지역이 없었다고 한다.

청룡 11중대는 1개중대병력으로 적군 1개연대 병력을 격파하였고, (15명사망:256명사망)

존슨대통령으로부터도 표창을 받을 정도로 외국군들이 한국군의 중대전술에 대해서

교육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5. http://www.vietnamwar.co.kr/

 

6. 성생활과 성병

북베트남의 호치민은 본인부터 금욕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등의 전사들에게도 금욕생활을 요구했다고 한다.

전쟁과 섹스 그것은 어쩔수 없는 것이다.

30여만명의 미군병사 숫자보다 훨씬 많은 50만명의 매춘녀들이 베트남에 있었다고 한다.

미군들은 성생활을 위하여 1주일 주어지던 휴가때면 매춘가로 향했다고한다.

그런데 5달러~14달러면 베트남 여자들을 하룻밤 안고 잘수가 있었단다.

디스커버리 동영상을 보면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군을 제일 무서워하였다고 한다.

왜? 그들이 마을에 들어오면 여자들은 겁탈당하고, 주민들도 몰살 당한다고 한다.

과연그럴까? 뭐 그랬을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 전쟁중이니까~~~

그러나 전투부대인 청룡, 맹호, 백마부대 용사들은 베트남 여자 구경도 못하고 온사람도

있다고 한다.

베트남전쟁에서 군인들이 성병이 많이 걸렸단다.

성병발병률이 100명당 28명이었단다.

 

7. 베트콩 1명에 5톤트럭 한량의 폭탄

전쟁은 있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싸웠다면 이겨야 한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싸웠지만 다른 나라들은 이데올로기로 인해서 참여를 했다.

특히 미국은 가진것 돈밖에 없는 나라여서인지 무제한으로 밀림과 정글에 돈을 던졌다.

폭탄세례 특히 네이팜탄은 순식간에 주변의 일정지역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며,

산소까지도 태워없애 버리는 무서운 폭탄이었다.

베트콩 한명을 죽이는데 5톤 트럭 한량의 폭탄을 썼다고 한다.

 

8. 호지명 루트

남부 베트남의 베트콩에게 보내어지는 무기와 장비들이 이동하는 루트가 있었다.

호지명 루트라고 한다. 육지는 라오스를 거쳐서 있는 산길이었으며, 바다에도 호지명 루트가 있었단다.

이 호지명 루트를 통해서 남부의 베트콩에게 아낌없이 물자와 무기들이 배달되어졌고,

결국은 베트남(월남)은 패망하게 된다.

 

9. 북한 파일럿

월남전쟁에 북한군 파일럿들이 10여명 전사한 곳이 있었다.

지금은 그곳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들의 고국인 북녘땅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무덤의 비석들을 어느 건물에 모두 모아 두었는 다는 동영상을 보았다.

죽었는 사망 시점을 보니 북한공군도 전쟁 초기부터 참전하였었다.

먼 이국하늘에서도 남북한이 알게 모르게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2013.10.14(월) 칼럼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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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연표 역사(歷史)

2006/07/06 16:25

 

복사 http://blog.naver.com/min2272/100025981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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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          프랑스군 사이공, 지아딘, 미토 점령

1862.          제1차 사이공조약 - 포교의 자유, 3개성 할양, 전함의 메콩강 통과 인정,

                                            프랑스의 승인없이 타국에 영토할양 불가

1867.          프랑스 남부 코친차이나 전지역 점령

1873.          프랑스 북부 통킹에 무력 진출 - 홍강을 통한 중국 내륙 진출 목적

                 제2차 사이공조약 - 베트남 주권, 독립 인정

                                            항구 개항(하노이포함), 홍강 개방

                                            남부6성을 프랑스 식민지로 정식 할양 

1883.          아르망조약(위에조약) - 프랑스와 응웬왕조

                 →외교권과 행정권을 프랑스에 위임(박탈)

1887.          베트남 분할 통치 - 코친차이나, 안남, 통킹

                 라오스, 캄보디아를 포함한 5개 지역을 프랑스 식민지로 하고

                 인도차이나 총독이 통치하도록 함

1919.          호치민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에 '베트남인민의 요구' 제출

1930.          베트남 공산당 결성

                  

1940. 9.       일본군 북부 인도차이나 점령

                  -프랑스는 당시 나치 독일의 괴뢰인 비시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에 베트남은 

                  종전대로 프랑스가 식민통치함. 

1945. 3.       일본군 진주, 바오 다이의 베트남 제국 성립

        4.       베트민-해방위원회 조직, 해방구, 인민위원회 조직

        7.       포츠담회담-북위 16도선 이남은 영국군이 이북은 중국군이 점령 합의

        8.       베트민- 8월혁명

        8. 19   바오 다이 제국의 하노이 권력 퇴진, 북베트남 권력 장악

        8. 23   후에 봉기 성공, 중부베트남 장악

        8. 25   베트남제국의 바오 다이 왕을 퇴진, 사이공에서 남부행정위원회구성

                  → 8월혁명 성공 

        9. 2    베트남독립선포, 전(全)베트남민주공화국수립

        9.      연합군 베트남 진주 - 북위 16도선 이북은 장개석군, 이남은 영국군

1946. 1.      영국군 프랑스군에 북위 16도선 이남의 전권을 이양

        2.      중국군의 철수, 프랑스군 북부지역으로 들어감

                 → 중국내의 프랑스 이권을 포기하는 교환조건으로 장개석 정부와 합의

        3.      베트남민주공화국과 프랑스 정부간의 협정(3월협정)

                 → 북부지역의 프랑스군 진주 용인

                    프랑스연방으로서 독립국으로 인정

                    중부와 남부를 병합하는 통일국가여부는 국민투표로 결정

                    프랑스군대는 5년간에 걸쳐 베트남 군대로 교체

        6. 1    프랑스-남부에 교지지나(코친차이나)자치국 정부 수립 → 3월협정위배

        8.      8월협정체결-3월협정축소(문화 경제분야에 한정, 북부지역에 한정)

        12.     8월협정폐기, 19일 베트남정부에 베트남군대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

                 제1차인도차이나 전쟁 본격 발발

1954. 5.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

        7. 12  프랑스 항복, 인도차이나 휴전 협정(제네바협정)

                -북위 17도선 기준으로 남북 분단, 2년안에 총선거 실시

                *이남에서 총선의 책임을 맡은 프랑스측의 조약의무포기(프랑스군의 철수).

                 이를 구실로 미국과 월남공화국이 총선을 거부,

                 베트남 전쟁의 시발점이 됨 (이북에서의 선거책임은 베트남민주공화국)   

 

1955. 10.    고딘디엠 국민투표로 공화국 선포하여 대통령취임 - (남)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통일을 위한 제네바 협정의 총선거실시 협약이 사실상 일방적으로 폐기,

                   베트남의 반역구적 분단이 고착 

1960. 12.20  베트콩 결성 -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소속

1961.          미국 정규군 최초 파견 - 케네디 대통령

1963. 11.2    군부쿠데타로 고딘디엠 살해, 돈반민 장군이 군부정권수립

1964  1. 30   제2쿠데타, 구엔 칸 장군 정권수립

        8. 4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 본격 개입 - 존슨대통령

1965. 2.       미군 베트남서 첫 교전 - 제2차인도차이나전쟁

1967. 9.       티우. (남)베트남공화국 대통령 선출

1968. 1.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일제 공세(구정대공세)

        5.       파리평화회담 - 미국, 베트남민주공화국(북)

1969. 5. 20   파리평화회담 - 베트남공화국(남), PRG(베트남민족해방전선) 포함

        9. 3    호찌민 사망

1970. 4.       캄보디아로 전쟁 확대

                 - 미국의 지원을 받아 캄보디아 정변성공한 우파세력(론놀정권, 크메르공화국)과  

                   좌파세력(크메르루주, 폴포트)간의 전쟁

1971. 5.       라오스로 전쟁 확대

1973. 1. 27   파리 평화(정전)협정 조인(미국, 베트남공화국, 베트남민주공화국, PRG).

                 미군 철수 시작 - 닉슨대통령

        3. 29   미군 철수 완료

1975. 4. 30   사이공 함락,(남)베트남공화국 정권 붕괴

        5. 1    (남)베트남공화국 대통령이 민족해방전선군 대표에게 무조건 항복 

1976. 4. 26   남북통일 총선거 실시

        7. 2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출범.

                 사이공은 호찌민시로 개명

 

[출처] 베트남 전쟁 연표|작성자 박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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