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에서의 전쟁.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눈의 꽃 | 2010. 6. 25
80 답변 #1 :
1. 6.25 전쟁이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났는지
1950년 6월 25일(시작)~1953년 7월 27일(휴전 협정)
2. 왜 이름이 6.25 전쟁인지
특별히 뜻은 없지만>>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에서의 전쟁 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3.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이것은 위의 답변과 동일 합니다
4. 전쟁에 참여한 나라는 어떤 곳이 있는지
미국: 제5공군/제7함대/제8군(육군)및 의료장비 및 군수품 지원,영국: 극동 해군, 공군/지상군1개여단,호주: 해군 /공군/ 지상군,
뉴질랜드:해군/공군/지상군,네덜란드:지상군/해군,캐나다: 해군/지상군,프랑스: 해군/ 지상군,필리핀: 지상군,스웨덴: 병원선,
터키:지상군/해군,타이: 공군/지상군,남아공: 공군,인도:병원,그리스:공군/지상군,벨기에: 지상군,룩셈부르크: 지상군,
덴마크:병원선,콜롬비아:해군/지상군,에티오피아: 지상군,노르웨이:병원,이탈리아: 병원
5. 당시 몇 명이 죽었는지
대한민국
군인
14만 9005명 전사,71만 783명 부상,13만 2256명 실종
민간인
37만 3599명 사망,22만 9625명 부상,30만 3212명 행방불명
총계
52만 2604명 사망,94만 408명 부상,43만 5468명 실종,총계 189만 8480명 사상
미국
3만 6940명 전사,9만 2134명 부상,3737명 실종,4439명 포로,총계 13만 7250명
호주
339명 전사,1216명 부상,3명 실종,26명 포로,총계 1584명
캐나다
312명 전사,1212명 부상,1명 실종,32명 포로,총계 1557명
영국
1078명 전사,2674명 부상,179명 실종,997명 포로,총계 4908명
뉴질랜드
23명 전사,79명 부상,1명 실종,총계 103명
필리핀
112명 전사,229명 부상,16명 실종,41명 포로,총계 398명
터키
741명 전사,2068명 부상,163명 실종,244명 포로,총계 3216명
네덜란드
120명 전사,645명 부상,3명 포로,총계 768명
북한
군인
29만 4000명 전사,22만 6000명 부상,12만 명 실종 및 포로
민간인
40만 6000명 사망,159만 4000명 부상,68만 명 행방불명
총계
70만 명 사망,182만 명 부상,80만 명 실종,총계 332만 명 사상
중국
13만 5600명 전사,20만 8400 부상,2만 5600명 실종 및 포로,총계 36만 9600명 사상
소련
315명 전사,500명 부상,총계 715명
총계: 1,190,000명 ~ 1,577,000명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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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속내(소련포함, 미국포함, UN군포함,..)
1·4 후퇴는 한국 전쟁 당시 중공군의 참전 소식을 들은 국제 연합군이 대규모로 퇴각한 사건으로, 공산 진영이 서울을 탈환한 사건을 가리킨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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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공군 참전
북한군의 남한침공 이틀후, 그리고 중공군 개입 3개월 전인 1950년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으로부터 대만을 보호하기 위해 대만해협으로 미해군 제7함대를 급파하였고, 같은 해 8월 4일, 마오쩌둥은 소련정치국에 중화인민의용군의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전쟁에 개입할 것임을 보고하였다. 8월 20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UN에 "한국은 중국의 이웃나라이므로...중국인은 한반도 상황에 개입해야만 한다."는 내용을 통보하였으며 중립국 외교관을 통하여 "중국의 안전을 위하여 UN의 한국전 개입을 방해할 것"이라 미국에도 통보하였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UN을 협박하기 위한 뻔한 시도"로 결말을 내렸다. 1950년 10월 2일, 한국군이 38선을 통과한 다음날, 소련 정치국은 중공군 개입을 승인하였고 후에 중공군은 미군 폭격기가 북한을 향하던 중 중공의 영공을 침범하였기 때문이라 주장하였다.
9월 모스크바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외교와 개인적 노선을 동원해 스탈린에게 군사와 물자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지체함에 따라 마오쩌둥도 예정을 변경하여 한국전 개입을 1950년 10월 13일에서 19일로 연기하였다. 소련군은 또한 공중엄호를 서방공군과의 전쟁경험을 위한 전선에서 100km 이상의 거리에서만 허용하였으나 이용된 미그-15s기는 UN의 제공권에 큰 위협을 가하였다.
1950년 10월 8일, 미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진군 다음 날, 마오쩌둥은 중화인민해방군 북방지역군에게 중화인민의용군 휘하로 편입하여 한국을 침공할 것을 명령하였다.
중공인민의용군의 야간진군과 오전 5시30분 이전까지 전개된 대공위장술, 그리고 이어진 주간진군팀의 다음 야영지 수색은 미 항공수색의 의용군 포착을 어렵게 하였다. 주간진군동안 항공기가 포착되면 사라질 때까지 병사들은 미동을 정지한 채 있도록 하였고 그러한 전략은 3사단을 만주의 안퉁에서 한국전쟁지역까지 460km를 19일동안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하였고 반면 산악지대를 행군로로 선택한 다른 사단은 18일동안 29km를 행군하는데 그쳤다.
그 동안, 1950년 10월 10일, 제 89전차대대는 제1기갑사단에 포함되는등 UN군은 기갑을 강화하고 있었다. 10월 15일, 비교적 약한 북한인민군의 저항에 맞서 제7 기갑연대와 제 70전차대대는 남천잠을 획득하였고, 10월 17일 평양으로 가는 주로의 우측측면으로 우회하여 황주를 공략하였다. 이틀 후, 제1기갑사단은 평양을 점령하였고 1950년 10월 19일, UN군은 북조선 공략에 성공하였다.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 웨이크 섬(Wake Island)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중공군이 개입하기에는 이미 늦어 침공가능성이 적다고 의사를 밝혔고 중공군은 만주에 30만, 압록강변에 10~12만5천 명의 군이 포진해 있으며 그중 반 정도가 압록강을 넘어 남진할 수도 있으나 "공중지원 없이 그들이 평양으로 진격할 경우 대패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두 번의 작은 충돌 후, 1950년 11월 1일 북한진영 깊숙이에서 첫 번째 대규모 미-중 전투가 벌어졌다. 수천의 인민의용군이 곳곳에 산재한 UN지휘부대를 북쪽, 북서쪽, 서쪽 3개 방향에서 삼자창전법으로 포위, 공격하여 방어태세의 측면을 괴멸시켰다. (운산전투). 11월말, 서부진영 청천강 유역에서 인민의용군은 몇몇 한국군 사단과 남아있던 UN군의 측면을 괴멸시켰고 UN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터키여단이 중국국경의 군우리에서 방어에 성공함에 따라 미8군은 퇴각로를 확보하였고 중화인민의용군의 진격을 4일간 늦출수 있었다. 동부진영의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삼지창 전법에 익숙하지 못했던 3 미 제7보병사단의 연대전투단(3000명)과 미 제1해병사단이 5군단의 지원사격하에 겨우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는 10배에 달하던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으로 미군측이 15,000명의 사상자를 낸 전투이다.
초창기의 전방 인민의용군은 중화기나 승무원 탑승의 경기갑이 전혀 없었으나 빠르게 그들의 이러한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일반적으로 사용된 전법은 50명 규모의 소대에서 200명 규모의 중대등 작은 규모의 부대를 침투시켜 여러 분대로 나눈 후, 한 분대가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는 사이 남은 분대는 전방와 측면을 합동공격하는 것이었다. 방어세력이 결국 패하여 후퇴할 때까지 전방위 공격을 줄기차게 한 후 중공군은 다음 소대위치의 측면으로 몰래 이동하여 같은 전법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대공세 국면에서는 경험이 풍부한 경보병이 박격포 이상의 중장비의 도움 없이 공격을 주도하였고 이들 중공군은 수십 년 동안 중일전쟁과 국민당과의 내전을 통해 잘 훈련된 모습을 보였으며 야간기습에 특히 뛰어났고 무엇보다도 군사위장에 능통하였다. 순찰대는 UN군의 위치추적에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들 부대의 후면으로 이동, 퇴각로를 차단 한 후 삼자창 전법으로 전방위 대공세를 가하는데 뛰어났다. 또한 하치 시키라 불리는 전법도 구사하였는데 이는 V자 진형을 구축하여 적군을 진형 가운데로 끌어들인 후, V자의 입구를 막아 퇴각로를 차단, V자 좌우측면이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전법이었다. 이러한 전법은 온정, 운산 그리고 초산 전투에서 큰 성공을 보였다.
11월 말, 인민의용군은 UN지휘본부를 북동부 북한에서 38선 이남까지 밀어내었다. 북한으로의 진격때보다 빠르게 퇴각한 UN군은 북한 동부해안에 위치한 흥남시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구조를 기다렸다. 1950년 12월, 193척 분량의 UN군과 물자(군인 105,004명, 민간인 98,000명, 차량 17,500대, 물자 350,000톤)이 탈출하여 부산에 정박하였고 1950년 12월 16일, 트루먼 대통령은 대통령 성명으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1951년 1월, 중화인민의용군과 북한인민군은 제 3단계 공세(중공군 동계 대공세)에 들어가 UN군을 비밀리에 포위, 공격하는 야간전술을 펼쳤다. 공격에는 요란한 나팔과 징이 동원되어 작전전달과 적군을 혼란시키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전법을 처음 목격한 UN군은 중공군 동계작전에 압도되어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중공군에 빼앗기게 되었다.
게다가 미8군의 워커 장군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것이 군의 사기저하를 불러오게 되고 이러한 차질에 맥아더 장군은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후 이로 인해 발생한 방사선 낙진지역을 중공군의 보급로 차단에 이용할 것을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곧 워커장군의 대체로 투입된 카리스마적인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후속 사령관으로 임명된후 유혈이 낭자했던 미8군은 곧 다시 회생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에 중국 공산당이 투입한 군사는 92만6천명이나 되어 UN군과 한국군을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였다.
2. 평양, 흥남철수와 서울함락
1950년 12월 장진호와 같은 곳에서 벌어진 공산진영의 예상치 못한 강력한 반격에 부딪친 한국군과 미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이 12월 4일에 평양을 철수하고, 이를 평양 철수 작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흥남철수라고 한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미국 1해병사단도 12월 24일에 흥남에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3. 원산폭격
인민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이승만 대통령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그러나, 12월 9일에 원산에서 철수하였다.
4. 서울 재수복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이승만은 38선은 공산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인민군은 10여 만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다시 북진했으나 대대적인 공격이 없는 참호를 중심으로 한 진지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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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岳:북악산)과 목멱 (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황단(皇壇)에서 천제(天祭)를 봉행하고 대한국(大韓國) 1대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신라(新羅)·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의 3한(三韓)을 아우른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천명하여 대한시대(大韓時代:1897- )가 시작되어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의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 및 영토,영해가 1919년 4월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의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계승되었다. 1919년 3·1대한광복운동 후 4월 10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국인 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4월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개원 회의에서 국호는 대한(大韓)으로, 정체(政體)는 민주공화제를 의미하는 민국(民國)으로 각각 의결함으로써 1919년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원년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1조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으로 함’이라 천명함으로써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2차 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을 선출했으며 의장은 이동녕, 부의장은 손정도를 선출했다.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은 법률안 의결, 임시 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다.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은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國務員)을 구성하였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 국무원(國務員) 행정수반인 국무총리(國務總理)에 이승만(李承晚)을 추대하고 내무 안창호, 외무 김규식, 군무 이동휘, 재무 최재형, 법무 이시영, 교통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였고 한성(漢城)에는 한성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연해주에는 대한국민의회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9월 상해 임시정부에 통합되었고 이승만(李承晚)을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의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 통치권자 국가 원수(國家 元首)인 대통령(大統領)으로 선출하였다.
6·25 전쟁은 세계 공산국가의 지도국인 소련의 스탈린과 1949년 중국대륙을 공산화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이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 탱크, 전투기, 야포, 박격포 등 군사력을 전폭적으로 원조하여 대한민국의 북부 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 김일성에게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 무력 침공을 지시하고 1953년 7월 27일 유엔연합군 수석대표와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지원군, 대한민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 대표가 판문점에서 6·25전쟁 정전협정을 조인한 3차 세계대전이다.일본제국주의 총독통치가 남북분단의 원인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일본제국주의가 거부하여 미군은 일본 영토에 원자폭탄 2개를 투하하였고 소련군은 대한민국의 북부 지역에 진격했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일본제국주의 총독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8.15 대한 광복을 하였으나 이후 38선을 기점하여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38선 북쪽에 소련군의 군정, 남쪽에 미군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은 남쪽의 이승만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고 세계 공산국가의 지도국인 소련의 스탈린은 대한민국 북부지역에 공산반군 괴뢰정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를 수립하여 남북 간의 긴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대한민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남북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은 대한민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비밀 협상을 하여 소련의 무기들이 대다수 공산반군 괴뢰정부에 지원되었고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 역시 전쟁에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대한민국의 북쪽 공산반군 괴뢰정부의 김일성은 1949년 무렵부터 수 차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을 만났으며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침공하여 공산화하는 계획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스탈린은 공산반군 괴뢰정부에 소련제 T-34/85형 탱크,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야포와 박격포 등 강력한 군사적 원조를 하고 있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산반군 괴뢰정부에 전쟁 원조를 하는 조건으로 공산반군 괴뢰정부 김일성의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전쟁계획을 승인하였다.
소련은 1948년 12월 대한민국 북부지역에서 철수하였으나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는 대한민국 북부지역의 공산반군 괴뢰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간도에 있던 의용군 부대로 대한민국 북부지역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 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1949년 2월 스탈린은 대한민국 북부지역의 공산반군 괴뢰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군사력 원조를 논의하였다. 6·25전쟁을 앞두고 김일성의 요청과 마오쩌둥의 지시에 의해 팔로군(八路軍) 중 한인 출신들로 의용군을 만들어 입북시켰다. 이 중 팔로군 4 야전군 휘하 55군단 164 사단은 간도지역에 주둔해 있는 한인들로만 구성된 단일부대로 1949년 7월 20일 입북하여 인민군 5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입북한 사단 인원은 10,821명이다. 4 야전군 휘하 55군단 166사단은 국민당군을 쫓아 대만해협까지 진격한 역전의 사단이며 한중 혼성 부대이다. 원래는 166사단 중 1개 연대만 한인이며, 의용군으로 개편 과정에서 중국인들을 한인으로 교체하여 1949년 7월 20일 입북시켜 인민군 6사단으로 개편시켰다. 사단 병력은 10,320명으로 6·25전쟁 당시 걸어다니는 공수부대라고 불리며 미 24사단을 괴멸시키고 한국군 사단 대부분을 격파한 최강의 부대가 되었다. 이후 김일성의 요청으로 팔로군 156사단을 중심으로 139, 140, 141사단의 한인들을 모아 1950년 4월 경 입북하여 약 1만 4천 병력으로 인민군 7사단을 만든다. 그 외 중국인민해방군에 부대 단위가 아닌 개인적으로 복무 중인 한인들을 모아 1개 연대를 만들어 입북시키는데 이들은 오토바이 연대가 된다. 이렇게 하여 마오쩌둥이 보내준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 출신 의용군은 3개 사단 5만명이다.
대한민국 북부지역에서 6·25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이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대한민국 북부지역의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6·25전쟁을 준비함에 앞서 대한민국의 정보를 상당부분 알고 있었다. 특히 평양에서 발견된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 정보문건에 의하면 대한민국 각 행정 소재지의 군(郡) 단위까지 1950년도의 쌀, 보리 등의 모든 농작물 예상 수확량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었다.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 한 해 동안 확보할 수 있는 식량의 규모, 즉 공출량을 계산한 상태였다. 특히 모든 종류의 주식은 물론이며 주식이 아닌 깨까지 군 단위별로 예상 수확량과 공출량을 매겨 놓았다.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 대한민국에 전혀 전무했던 T-34/85를 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에 닦아놓았던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인민군 949군부대는 6월 24일 오전 1시 38선 부근에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의료요원들을 각 해당 부분에 배치하였다.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대한민국의 병력은 정규군 19만 5천여 명, 해양경찰대 9천여 명, 경찰 68만 5천여 명 등이었다. 인민군은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공군은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 및 L-5 연락기,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T-6 텍산 10대를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육군은 탱크와 기갑 차량(장갑차)은 전무했으며, 유일한 독립 기갑연대의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정찰용으로 쓰인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대대가 전부였다. 또한 포병은 105mm 화포와 4.2인치 박격포만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사단 당 1개 대대만 배치되어 있었고, 포탄도 부족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대한민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은 242대의 공산국가의 주력 전차인 소련제 전차, 야포를 앞세우고 38선 남쪽의 대한민국을 공격해 왔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 국군은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였다.1950년 6월 26일 밤 10시 30분 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 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대한민국정부는 인민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고 인민군은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과 경상도 동해안, 대구, 울산, 경주, 영천과 그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 장면과 서기관 한표욱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6월 26일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방문,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유엔(UN)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 같은 날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미국 상, 하원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6·25전쟁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미국과 유엔(UN)은 대한민국 영토에서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을 철수하라는 결의를 공산반군 괴뢰정부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유엔(UN) 안보리 이사회는 공산반군 괴뢰정부에 대해 대한민국 땅에서의 즉각 철수를 권고하였다.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군,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는 6월 29일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미국 육군 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UN)연합군을 조직하여 6·25전쟁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군의 전설로 불리는 명장 몽클라르 장군이 6·25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대대장의 직함으로 프랑스 군을 이끌고 미군에 예속되어 참전하였으며 터키군의 영웅 타흐신 야즈즈 장군 역시 2개 여단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콜롬비아의 게릴라 용병부대가, 에티오피아의 경우 황제의 특명에 의해 아프리카 원주민 병력과 정규군과 황제 친위대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등등 참전국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갖고 대한민국을 도와주기 위해 참전했다. 이들 중 총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본국에서 창과 화살을 준비해오기도 했으며 미군에서 총을 지급해주기도 했다.7월 1일 영국과 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벨기에·캐나다·콜롬비아·프랑스·그리스·에티오피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뉴질랜드·필리핀·타이·터키·영국·남아프리카 연방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UN)연합군이 편성되었다.8월까지 인민군은 대구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다. 대한민국 국군 1사단장 백선엽은 다부동에서 인민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8월 3일 유엔(UN)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를 받은 미군은 새벽 5시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 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어 국군 제17연대, 미군 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이 주도한 인천반도 공격이 이어졌다. 인민군 18사단과 인천 경비 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1연대는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을 성공적으로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그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어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서부는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의 초산에 이르렀고, 중부는 장진호까지 진격했으며, 동부는 압록강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또한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공산반군 괴뢰정부와 인민군을 미리 10월 9일에 북쪽으로 거의 모두 철수시킨 다음에 10월 12일부터 평양에서 철수했다.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했다.
대한민국 국군 및 유엔(UN)연합군에 의한 남북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김일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을 만났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중화인민공화국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타이완도 중화민국 통일을 위해 쳐들어올 거라는 추측으로 인해 결국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화인민공화국, 대한민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의 공산주의 혁명을 지켜야 되는 목표를 삼았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반격해 왔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내전이 갓 끝난 상황으로 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참전자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개입할 당시 소련이 중공에게 많은 무기를 보내줬고 소련군이 몰고 있는 전투기들도 중공 마크를 달고 공격하기도 하였다. 의용군을 바탕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이 인해전술로 공격해왔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주로 야간 이동을 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해 어둠을 틈 타 기습하는 등 지형지물을 정교하게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12월 4일에 평양 철수를 하고 이어 대한민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12월 6일에 수도 평양을 되찾았다. 한편, 12월 9일부터는 유엔(UN)연합군이 원산을 철수하였고,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이승만은 2월 15일 남북통일을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중 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휴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유엔군은 38선을 넘었고 방어선을 쳤다.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투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소련이 전투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였다.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6·25전쟁 휴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정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제한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대한민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 무장해제, 국제 연합 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 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 의제에 합의하였다. 6·25전쟁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참전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정전협정을 추진하였다. 미국은 소비에트 연방 및 중화인민공화국 측과 6·25전쟁 정전을 논의하였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남북분단 상태에서의 정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주공화제의 단일국가로 통일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1953년 3월 5일 소련 스탈린의 죽음으로 휴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6·25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에 통보하면서 부상 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했다.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 대한민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는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UN)연합군 측의 승인으로 6·25전쟁 휴전이 성립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유엔(UN)연합군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과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지원군, 대한민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 대표 남일(南日)이 판문점에서 6·25전쟁 정전협정(停戰協定)을 조인하였다.일본제국주의 총독통치가 남북분단의 원인이며 6·25전쟁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이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 군사력을 전폭적으로 원조하여 대한민국의 북부 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 김일성에게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 무력 침공을 지시하고 1953년 7월 27일 유엔연합군 수석대표와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지원군, 대한민국 북부지역 공산반군 괴뢰정부 인민군 대표가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을 조인한 3차 세계대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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