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이야기/국방 이야기

국방: 6.25 장진호 전투

영일만2 2013. 3. 24. 20:20

 

 

 

世界 2대 동계(冬季)전투: 장진호 전투 이야기  
 
 한국전 참전 美해병대가 무너졌다면 UN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을 것이고,
 대한민국의 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다.


金泌材   

11월의 영웅들 - 장진호 전투와 美해병 제1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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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장진호 전투)에 지친 美해병 제1사단
 소속 장병의 모습.
전사가(戰史家)들은 6.25전쟁을 크게 3단계로 분류한다.

▲제1단계는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에 따른 개전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으로 정세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점이다. ▲제2단계는 38선을 돌파해 압록강까지 진출해 거의 전쟁이 끝날 것으로 여겨졌던 시점. ▲제3단계는 중공군의 참전에 따른 UN군의 후퇴와 그 이후 휴전까지 전개됐던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시기이다.  

이 가운데 ‘장진호(長津湖) 전투’(1950.11.27~12.11)는 6.25전쟁의 제2단계에서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을 돌파한 UN군이 북한의 청천강 이북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대병력(12만 명)을 만나 후퇴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투이다.

전쟁초기 청천강 유역의 서부(西部)전선에는 美8군 휘하의 美 제1군단(美 제24사단, 국군 제1사단, 英연방 제27여단으로 구성), 중앙에는 제9군단(美 제25보병사단, 제2보병사단, 여단규모의 터키 전투단), 그리고 조금 동쪽으로 국군 제2군단(국군 제6사단, 7사단, 8사단), 예비대로 美 제1기병사단과 英연방 제29독립보병연단이 전개하고 있었다.

美 해병1사단, 중공군 12만 명과 사투(死鬪)벌여

동부전선에는 원산에 상륙했던 해병대 병력과 육군 병력으로 구성된 美 제10군단(美 제1해병사단, 美3사단, 美7사단), 국군수도사단과 3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국군 제1군단이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美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크리스마스 공세’의 공격개시일을 11월27일로 정하고, 美 제1해병사단에게 무평리를 목표로 진격해 제8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제5 및 제7연대는 11월 25일 유담리까지 진출한 후, 11월 27일 아침에 유담리에서 무평리를 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이 저지되고 말았다.

동부전선의 美 제10군단에 예속되어 있던 美 제1해병사단(1만 2,000명)은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공군 제9병단의 공격을 받고 7개 사단 규모(12만 명)의 중공군이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빠져나오기 위해 2주일 동안에 걸친 死鬪를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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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모습. 사진 맨 오른쪽 인물이 美해병 제1사단을 지휘한 올리버 소장이다.


이 전투에서 美 제1해병사단은 혹심한 추위를 무릅쓰고 유담리로부터 진흥리까지 40㎞가 넘는 협곡을 겹겹이 에워싼 중공군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美 제1해병사단은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하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해 함흥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장진호 전투’의 주인공인 美 제1해병사단은 1950년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후, 11월 2일 함흥 북방 수동 일대에서 중공군을 물리치고 진격을 계속해 진흥리와 황초령을 거쳐 고토리를 점령했으며, 11월16일에는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에 도달했다.

당시 美 제1해병사단을 공격하고 있는 중공군 제9병단(제20, 26, 27군) 12개 사단은 11월 초순 집안에 도착, 곧 압록강을 넘어 장진호방면으로 신속히 남진해 있다가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1차공세를 통해 시간적 여유를 얻은 후 11월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유담리에 있던 美 제1해병사단 2개 연대에 투입된 부대는 4개 사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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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에서 美해병대는 해병대의 전통에 따른 부상자뿐만 아니라 전사한 전우들의 시신과 함께 철수했다.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2차 공세로 인해 美 제8군의 전선이 붕괴되자 UN군사령부는 11월30일 전면철수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유담리의 해병 2개 연대는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해 사단과 합류한 후 흥남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11월30일 美 제1해병사단의 주력부대는 유담리에서 돌파작전을 시도, 12월2일 덕동고개까지 진출한 후, 하갈우리로 향한 돌파작전을 실시했다. 하갈우리에는 스미스 장군 휘하 약 1만 명의 병력과 1천대 가량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해병대에게 하갈우리의 도착은 철수의 첫 단계에 불과했다. 고토리, 진흥리,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함흥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올리버 사령관, 사병들과 生死 함께해

중공군은 美 해병 2개 연대에 4개 사단을 투입하여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하갈우리로부터의 미군 철수로에 대하여 종전의 4개 사단에다 추가로 5개 사단을 투입했다. 또한 중공군은 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 도로상에 주요 교량을 폭파하고 장애물을 설치하여 美 해병의 철수에 치명타를 입힐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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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추위에 凍死한 美해병대 장병들의 모습. 그들은 추위속에서 조국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죽어갔다.


이에 UN군 측에서는 철수를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美 제1해병 사단의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사령관(Oliver P. Smith, 소장)은 이를 거절하고, 육로 철수를 단행했다.

당시 2차 대전의 경험이 있는 일당백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노련한 해병대원들과 올리버 사령관은 부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헬기로 포위 지역에 지휘소를 차리고 사병들과 生死를 같이 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었다.

당시 올리버 사령관은 이 작전이 후퇴작전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후퇴라니! 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 중”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때부터 美 해병 제1사단은 “후퇴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을 위한 긴 여정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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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9일 美10군단은 모든 UN군으로 하여금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12월10일 오전 6시, 美해병 제1사단은 행군 행렬이 함흥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12월11일
저녁까지 최종부대가 함흥에 도착했다. 흥남에서는 14일~24일까지 UN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해상으로 철수했다. 사진은 흥남부두 폭파를 지켜보고 있는 호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12월 6일 하갈우리를 출발한 美 해병대와 美 보병 제7사단 1개 연대는 끝내 죽음의 통로를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1일에는 최종 목적지인 함흥과 흥남간의 집결지에 도착함으로써 14일간의 철수작전을 마치게 되었다.

11월27일~12월11일까지 美 제1해병사단은 전사상자(戰死傷者) 3,637명 비전투전사상자(非戰鬪戰死傷者) 3,657명을 기록했다. 비전투사상자 대부분은 동상환자였다. 중공군 제9병단은 장진호 전투로 무력화됐다. 10월15일~12월15일까지 戰死 25,000명, 負傷 12,5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中共軍의 ‘3차 공세’ 막는데 공헌

이 전투결과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간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하였던 국군과 UN군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됐다. 곧 이어 개시된 흥남철수작전도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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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을 만든 'Chosin Few'(장진호 전투 참전용사 모임) 들은 지금도 존경의 대상이 되고 니다


중공군 제9병단은 당시 피해로 중공군 3차 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됐다. 중공군의 3차 공세는 후속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게 됐다.

반면 국군과 UN군은 반격을 기틀을 마련해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금 주도권을 쥐게 됐다. 전사가(戰史家)들은 당시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 추위 속에서 美 해병대가 무너졌다면 UN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장진호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이 벌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冬季) 전투이자 6.25전쟁의 10대 전투로 꼽히는 전투로 戰史에 기록됐다. <조갑제닷컴>

[헤럴드생생뉴스] 미국과 중국이 6.25 전쟁에서 치열한 전투로 5만명의 사상자를 낸 장진호 전투가 영화상에서 격돌할 전망이다.

 

중국은 6·25 전쟁 당시 미군과 맞붙었던 ‘장진호(長津湖) 전투’를 블록버스터 영화로 제작한다. 할리우드 감독 에릭 브레빅 씨

 ‘혹한의 17일(17 Days of Winter)’이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미군의 분투를 다룰 예정이다. G2로 불리며 외교·경제·군사 각 분야에

서 파워 게임을 하는 라이벌 국가간 기싸움이 스크린 전쟁으로 재현될 조짐이다. 19일 대만 연합보에 따르면 최근 막 내린 전국인

민정치협상회의(전국정협)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산하 바이(八一)영화제작소 황훙(黃宏) 소장이 장진호 전투를 영화로 제작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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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5일 날,

한국전 때 장진호 전투에서 사망한 한국군 유해 12구가

하와이로부터 한국으로 봉환되었습니다.

 

 

개마고원의 산속에 50년, 그리고 넘의 나라 미국에서 비닐봉지에

담겨 10여년 방치 되었습니다. 국군의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거수경례로 그분들을 맞았습니다.

 

 

대통령이나 국민이나 **** 입니다. 자기 새끼가 군대가서

손가락 하나만 잘려도 거품을 물을 텐데. 아직도 우리에게

13만구의 한국전 유해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월남전에 흘리고 온 유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영령들께 미안하고 또 미안하군요.

 

 

 

 

보도 중에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가 세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미군 전사에서 가장 처절했던 패배로 기록된다는 장진호 전투는

아수라 같던 한국전의 단면을 보여주는 전투입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10만명에 달하는, 미 10군단과 한국 1군단을

구하고 붕괴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해 준 전투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살아계신 초신퓨(chosin few)들께 경의를 표할뿐입니다.

 

 

 

어쩌면 인류 문명사에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 질수 있을까요.

한국전쟁에 대해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과거 처절한 조국의 운명에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50년 10월 1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며 북진을 개시합니다.

10월 26일 한국군 6사단 7연대가 최초로 압록강, 초산에 도착합니다.

아수라의 전쟁이 끝나는 것일까요?

 

 

다음날 6사단장 김종오로부터 2연대와 7연대로 짧은 전문이 옵니다.

‘귀 연대는 위험에 처했음, 휴대할 수 있는 무기만 가지고 알아서 잘

철수하기 바람.무훈을 빔.'

 

그 다음날 7연대장 임부택이 명령을 내립니다.

‘7연대 전 장병은 적진을 각개 돌파하여 다음 지역에 집결하라.’

 

김종오 사단장이 부대를 포기합니다. 압록강 도착 하루 만에 통일의

장밋빛 꿈이 아수라의 공포로 변합니다.

 

 

6사단의 등 뒤에서 중공군 38군.40군.39군 15만 병력이 전개해

6사단을 겹겹이 포위하고 괴멸을 시킵니다.

 

 

한국전 초기 소양호 전투에서 군단 병력을 육탄으로 저지하며 3일 동안

항전해, 수원을 포위해 한국군을 섬멸하려던 북한의 전략을 망가트렸던

영웅적인 청송부대가 여기서 어이없이 망가집니다.

 

 

증말로 해괴하고 망측스런 일입니다

한국군과 유엔군 30만명이 압록강으로 몰려갔는데 등 뒤에 숨어 있는

중공군 15만명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150명이 숨어 있으면 몰라도

15만 전투 병력을 과연 보지 못한 것일까요 ? 보고도 대책 없이 그냥

올라갔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미 8군 예하 미 1군단.미 9군단. 국군 2군단이 제공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꿩총 메고 내려온 중공군 15만명에 사정없이 망가져 철수합니다.

 

 

제공권을 장악한 30만 병력이 15만 중공군에 밀리면서 인해전술에

밀렸다고 호도합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유엔사령부의 일부 정치군인들의

이 엄청난 실수는 실수를 넘어 전쟁범죄 수준입니다.

 

 

이 와중에 맥아더는 허황된 전략을 준비합니다.

이른바 X-mas 대공세입니다.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동부전선의 10군단과 국군 1군단을 두만강과 압록강으로 급속 전개합니다.

 

 

맥아더는 중공과 소련의 동아시아 전력을 마치 마적단이나 떼강도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에 전쟁은 칠락 팔락

3년을 끌고 한국군 50만이 죽고 미군 4만명이 죽었습니다.

 

 

11월 미 8군을 밀어낸 중공군 2개 군단이 낭림산맥을 넘어 개마고원의

장진호수에서 마지막으로 북진하고 있던 미 해병 1사단을 포위하면서

이른바 장진호 전투가 시작됩니다.

 

 

대략 미 해병 1사, 만 이천 병력에 중공군 2개군단 10여만 병력의 공방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미 해병 1사단이 망가지면 이미 압록강과 두만강에 진출한

미 10군단 .한국 1군단 병력의 유일한 퇴로가 없어지는 절체절명의 싸움입니다.

 

 

역사는 이싸움에서 해병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를 예비해 앞서 진군한 10만

병력을 구하고 10만명의 피난민을 흥남철수에서 구합니다. 스미스는 사령부의

계속되는 속공 요청에도 불구하고 지역마다 퇴로를 준비하고 보급기지를 만들고

비행장을 준비하는, 원칙의 전쟁을 구사해 위기의 전선을 구합니다

 

 

 

미군은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를  The Chosin Reservoir Campaign’

이라고 기록 했습니다. Chosin은 ‘長津’의 일본어 표기인데 미군이 지도가 없어

일본 걸 쓴데서 유래했습니다.

 

 

기록이 들쭉날쭉하지만,

이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3,600명이 전사하고3,700명이 얼어 죽었으며,

4,000여명이 살아 돌아갔습니다. 이 살아남은 미군을 Chosin Few(초신 퓨)라고

부르며전투에서 살아남은 소수(Few) 군인을 미국은 최고의 영예로 대접합니다.

 

 

 

 

 

북한이 미군의 유해 한 구를 인도하는데 300만불을 요구했다고 하고, 자세히

밝히지는 않지만 3만불 정도를 지불했다는 보도도 들리는군요. 작년에 발굴을

중단 할 때까지, 미국이 280억 정도의 현찰을 북한에 지불한 것으로 파악 됩니다.

 

 

군수물자는 1종에서 10종까지 있는데, 1종이 식품이고 2종은 의류 3종은 기름이며

마지막 10종은 시체입니다. 10종 군수물자는 전쟁의 마지막에 처리되는  군수물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62년 동안 길바닥에 유기한 13만구의 10종 군수물자를

수습하기 전에는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